베트남전 참전 후 실종
안 하사의 부친 안영술은 대구사범학교 출신으로 슬하에 5형제를 두었다. 학수는 둘째 아들이었다. 가족은 베트남전에 참전했던 아들이 무사히 돌아온다는 기쁨에 들떠있었다. 그런데 돌아오기로 되어 있는 날 아들은 보이지 않았다. 안 하사 가족들은 삽시간에 충격에 휩싸였다. 부모는 혼비백산했다. 그날 이후 아버지는 국방부에 “왜 아들이 귀국하기로 한 날 돌아오지 않았는지?”를 문의하기 시작했다. 국방부에서 돌아온 대답은 “알아보고 있으니 조금만 기다려달라”였다. 이후 국방부는 똑같은 대답을 계속 반복했다.
안 하사 가족들은 더 이상 국방부의 대답을 앉아서 기다리고만 있을 수 없었다. 직접 관련자들을 찾아 나섰다. 아버지는 귀국한 아들의 전우들을 찾아다녔다. 아들이 근무했던 제1이동외과병원장을 지낸 의사(이형수)를 찾아가 아들의 실종과 관련된 실마리를 찾으려고 발버둥쳤다. 아들의 소식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렇게 7개월이 흘렀다. 이미 가족들의 가슴은 숯검정이 되었다.
북한 대남방송에 나온 안학수하사
연기처럼 사라져버린 ‘안학수 하사’가 갑자기 나타난 것은 이듬해인 1967년 3월 27일. 이른 아침 포항 동부초등학교 앞에서 문방구를 하는 주인이 허겁지겁 안영술 교장을 찾아왔다. 북한방송에서 이상한 내용이 나온다는 것이었다. 안 교장은 라디오를 들었다. 실종됐던 아들이 느닷없이 북한의 대남방송에 출연하고 있었다.
안 교장은 즉각 포항 중앙정보부에 신고를 했다. 아들이 왜 북한 방송에 나오는지 알려달라고 했다. 3월 27일 자정 중앙정보부 요원 2명이 교장 관사를 찾아왔다. 요원 한 명이 관사 정문을 지키고 있는 가운데 다른 요원이 안 하사 가족에게 안 하사가 대남방송에 나오게 된 경위를 설명했다. 요원은 가족들에게 다음과 같은 취지로 말했다.
“안 하사가 공무출장을 나갔다가 베트콩의 포로가 되었다. 안 하사는 베트남에 나와있던 북한 군사고문단에 넘겨졌고 북한 측이 중국을 거쳐 안 하사를 북한으로 데리고 갔다. 우리 정부가 곧 국제적십자사를 통해 포로송환 요청을 할 예정이다. 가족들 모두가 안 하사의 조속 송환을 촉구하는 목소리를 남겨달라.”
가족들은 전부 요원의 지시에 따라 짤막하게 녹음을 했다. 가족들은 중정 요원의 설명을 듣고 비로소 안 하사 실종의 전후 사정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안 하사가 곧 돌아올 수 있다는 희망을 갖게 되었다. 절망의 나날을 보내다 실낱 같은 희망을 발견한 것이다.
월북자의 가족누명..26년간의 감시
다시 2개월이 흘렀다. 중앙정보부 대신 보안사 요원들이 안 하사 가족을 찾아왔다. 태도는 돌변했다. 보안사 요원들은 대남 방송에 나온 대로 안 하사 가족을 ‘월북자 가족’으로 몰아세웠다. 보안사 요원은 안영술 교장의 교장직 사퇴를 종용했다. 월북자 가족은 잠재적 간첩이므로 최하위 계층으로 살아야 한다고 협박했다. 안 하사 가족들은 교장 관사에 살다가 하루아침에 달동네로 이사를 가야만 했다. 1960~1980년대 시대 상황에서 ‘월북자 가족’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형극(荊棘)의 길이었다. 안 하사 가족은 ‘간첩 접선 대상’으로 분류돼 수시로 조사를 받아야 했다. 부친은 교장직에서 물러나는 것도 모자라 강원도 산골 횡성의 교재 창고에서 일하는 임시노무원으로 쫓겨났다. 집안은 쑥대밭이 되었다.
형제들은 ‘월북자 가족’이라는 누명을 쓰고 그대로 살아갈 수가 없었다. 청와대, 중앙정보부, 국방부, 보안사에 진상규명을 요청하는 민원을 제기했다. 당국은 다르지만 답은 똑같았다. “월북자 맞으니 더이상 민원을 제기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관계당국이 내세운 근거는 안 하사의 대남방송이었다. 가족들은 ‘신원특이관리대상자’로 분류돼 24시간 감시의 대상이 되었다. 이런 상황이 1990년대 초까지 계속되었다.
월북자 가족이라는 누명이 영영 풀리지 않을 것만 같았던 1992년.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안학수 하사’ 문제가 불거져 나왔다. 경향신문 1992년 5월 12일자는 귀순간첩 정상환씨와의 인터뷰 기사를 실었다. 정상환씨는 1969년 9월 귀순한 사람이다. 인터뷰 기사에 따르면 정상환씨는 1967년 4월부터 평안남도 대동면의 ‘의거자정치학교’에서 1년 동안 안 하사와 같은 내무반 생활을 했다. 정상환씨는 “안 하사가 베트콩에 포로로 잡힌 뒤 중국을 거쳐 평양으로 끌려오게 되었다는 말을 들었다”며 다음과 같이 밝혔다.
“의거자정치학교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생활해온 자들을 대상으로 사상개조학습을 벌이는 곳으로 당시 60명쯤 수용됐었다. 또다른 베트남전 포로인 박성렬 병장은 다른 내무반에서 생활했으며, 이름을 알 수 없는 한국군 장교 1명은 평양초대소에 수용, 교양을 받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 귀순 직후 이같은 사실을 관계기관에 모두 알렸으며 이에 따라 국방부 등에서 즉시 사실 확인작업에 나선 것으로 알고 있다.”
가족들은 다시 국방부, 보안사 등 관계기관에 이 인터뷰 기사를 근거로 “다시 조사해달라”고 민원을 제기했다. 하지만 돌아온 답은 똑같았다. “근거가 없다”는 것이었다. 동생 안용수씨는 보안사에 수없이 전화를 걸었지만 답은 달라지지 않았다. 안용수씨는 “빨갱이 가족 주제에 왜 자꾸 전화하냐?”는 보안사 직원으로부터 폭언도 들어야 했다.
가족들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남파간첩의 결정적인 증언보다 더 확실한 증거가 어디 있단 말인가. 이미 언론을 통해 안학수 하사가 포로가 되어 북한으로 납치되었다는 사실이 어느 정도 알려진 셈이었다. 그런데도 국방부는 “문서로 된 증거”를 요구하며 종전의 입장에서 전혀 후퇴하지 않았다.
전쟁포로로 죽은것 알고도 빨갱이 취급당한 43년의 세월
또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가족들은 지칠대로 지쳤다. 더이상 진상규명을 요구할 힘이 없었다. 그러던 2008년 5월 어느날이었다. 안용수씨가 서울 집에서 전화를 받았다. 자신을 외교부 출입기자라고 밝힌 한 기자가 전화를 걸어왔다. 그는 “안학수씨 동생이 맞냐?”고 묻고는 놀라운 사실을 제보했다.
“외교부에 비밀 해제된 베트남전에 관한 문서가 있다. 그 비밀문서에 보면 안학수 하사가 포로라는 사실을 입증하는 문건이 있다.”
기자는 이 문건을 갖고 있는 사람의 연락처를 알려줬다. 안용수씨가 이름을 묻자 기자는 “내 이름은 알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안씨는 받은 전화번호로 연락해 이메일로 ‘해제된 베트남전에 관한 외교부 비밀문서’를 전송받았다. 프린트한 비밀 문건은 모두 402쪽이었다. 그중 안학수 하사와 관련된 문건은 10쪽, 포로 업무와 관련된 문건은 30쪽이었다. 안용수씨의 증언이다.
“문서를 읽고는 충격과 분노와 회한이 몰려왔다. 혼자서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렸는지 모른다. 도대체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믿을 수가 없었다. 심리적으로 너무나 충격이 커서 도저히 앉아있기가 힘이 들어 계속 누워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런 문서가 있는데 그동안 정부는 왜 가만히 있었는지 정말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안용수씨는 다시 힘을 얻었다. 외교부 비밀문서를 바탕으로 국방부, 국정원, 기무사, 육군본부 네 곳을 대상으로 정보공개 청구를 제기했다. 정부가 갖고 있는 안학수 하사와 관련된 모든 문서를 보여달라는 내용이었다. 이렇게 입수한 기무사 비밀문건에서 안씨는 ‘안 하사가 1975년경 평양에서 총살형으로 죽었다’는 충격적인 사실도 알게 됐다. 사태가 이렇게 되자 정부도 더이상 무응답으로만 버틸 수가 없었다. 결국 2008년 10월, ‘안학수 하사에 관한 사실조사를 위한 정부합동조사단’이 구성되었다.
정부합동조사단은 베트남 현지에 가서 조사를 한 뒤 조사보고서를 내놓았다. 이 보고서는 포로와 관련된 부분을 전혀 언급하지 않은 채 피랍 개연성이 높다면서 통일부에 납북자 판정을 넘기겠다고 했다. 국방부는 끝까지 책임을 미루려고 했다. 하지만 통일부에서 납북자 판정 심의를 통해 안학수 하사를 납북자로 인정했다.
다시 군 인사기록부를 열람해 보고는 국방부로부터 기만당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인사기록부에는 전사(戰死)처리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탈영·납북’으로 기록되어 있었다. ‘국군포로 추정자’는 얼핏 보면 국군포로로 인정했다는 뜻 같지만 법적으로 국군포로가 아니라는 뜻이다. 군법에 의하면 탈영자는 전사 처리가 되지 않는다. 당시 국방부 장관은 이상희였다. 안씨는 다시 민원을 제기했고 결국 국군포로대책위원회는 2009년 8월 28일 ‘국군포로’로 정정했다. 마침내 2009년 12월 1일, 유가족들은 안학수 하사의 전사통지서를 받게 된다. 43년의 기나긴 싸움과 고통이 막을 내리는 순간이었다.
미국과 비교되는 한국정부
베트남전은 미국 할리우드에 수많은 영화의 소재를 제공했다. 베트남전을 다룬 할리우드 영화의 대부분은 정글 속에 억류된 미군 포로를 구출하는 스토리다. 실제로 미국 정부는 베트남전 종전 이후 미군포로 및 미군유해 송환을 위해 끊임없는 노력을 기울여왔다. 미국 정부는 국가의 부름을 받고 전장에 나가 희생된 이들이 집으로 돌아올 때까지 결코 잊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대한민국 국방부는 포로 구출은커녕 ‘베트남전 국군포로는 없다’는 허위 사실을 유지하기 위해 43년간 온갖 범죄행위를 서슴지 않았다. 박정희 정부 시절은 말할 것도 없고 그 이후 들어선 민주정부도 그랬다.
안학수 하사뿐만 아니라 베트남 전쟁 후 아직 집으로 돌아오지 못한 우리 청년은 모두 17명. 대한민국은 그 청년들의 어머니로서 아들들이 집에 돌아오는 그날까지 아들을 찾는 노력을 멈추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것이 바로 모국, 어머니의 나라가 해야 할 도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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