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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이야기

명문대출신 임산부가 범인이었던 "박초롱초롱빛나리 유괴사건"

by 프리디와이♡ 2022. 10.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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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어릴때 세상에서
제일 큰 사건이었는데
이름이 특이하고
굉장히 예뻤었다.


박초롱초롱빛나리 유괴사건 전말


1997년 8월 30일, 범인 전현주(당시 28세, 여성, 1969년생)는 서울 잠원동 뉴코아백화점(현 NC백화점) 버거킹에서 콜라를 마시며 서성이던 도중, 영어 학원의 수업이 끝나고 집으로 귀가하던 피해자 박초롱초롱빛나리(사망 당시 초등학교 2학년, 만 7세, 1989년 9월 8일 생)를 구슬려서 소품 제작실 겸 창고로 사용하던 사당동 지하 창고로 유인, 유괴하였다.


그리고 당일 저녁 총 3차례에 걸쳐 피해자의 부모에게 공중전화를 통해 2천만 원의 몸값을 요구하였다. 전현주는 첫 번째 협박 전화를 한 뒤 수면제를 먹였으며, 울면서 집에 보내줄 것을 애원하는 피해자를 목 졸라 살해했다. 시체는 창고에 유기했다.



유괴 다음 날, 전현주는 명동의 한 커피숍에서 피해자의 부모에게 전화상에서 말한 액수의 금액을 준비하고 오라는 내용의 전화를 하던 중 발신지 추적으로 들이닥친 경찰의 검문에 걸렸다. 경찰은 전화가 걸려온 지 9분만에 신속하게 전현주를 포위했지만, 커피숍에 있던 13명의 사람(여자 12명, 남자 1명)을 검문하다 임신 8개월 상태인 전현주가 설마 범인이겠느냐며 놓아버리게 되었다.


현장에서의 체포는 결국 실패했으나 대신 차선책으로 상기된 카페에 있던 13명 모두에게 형사들을 미행으로 붙여 조사했고, 전현주가 용의선상에 있었기에 경찰은 이미 집 주변을 수사 중이었는데, 이를 지켜보며 의아해한 전현주의 아버지 전모 씨가 9월 11일 경찰에 자신의 딸(전현주)이 범행 직후인 9월 1일부터 가출 상태임을 알렸다. 또 경찰에게 협박범의 목소리가 자기 딸의 목소리라고 증언했다. 결국 통화 내역으로 꼬리를 잡힌 전현주는 9월 12일 신림동의 한 여관에서 검거되었다. 결국 전현주의 부모가 신고했는데, 자신의 딸이지만 어린이 유괴 살해는 어떤 이유로도 용서할 수 없는 범죄였기에 부모들도 결국 등을 돌리고 만 것이었다.

전현주는 유복한 집안에 딸

검거 당시 전현주는 임신 상태였으며, 그 해 2월에 결혼식을 올린 상태였다. 내무부 산하기관에 근무하던 고위 공무원 출신 아버지를 둔 전현주는 유복하게 자랐으며, 본래 의사나 작가를 지망하고 있었으나 본인의 의지와 달리 협성대학교 무역학과를 거쳐 응급구조학으로 전공을 바꾼 후 미국행 유학길에 올랐다. 사건 2년 전인 25세 당시 서울예술대학교 문예창작과에 입학해서 총학생회 간부를 맡기도 했다. 커피숍에서 검문에 걸린 상태에서 전현주의 전화를 받고 달려온 서울예대 후배들이 경찰에게 임산부를 거칠게 대하지 말라며 항의하는 통에 경찰이 풀어준 것도 이때문인데, 전현주가 범인으로 밝혀지자 서울예대는 엄청난 비난을 받게 되는데, 비난이 얼마나 심했는지 사건과 아무 관계 없는 서울예대생들이 학교를 못 다니고 휴학을 해야했을 정도였다(당시 서울예대 남산캠퍼스는 명동역에서 직선거리로 200m에 위치해 있을 만큼 가까웠다. 연락만 된다면 몇분 안에 도착 가능한 거리).

전현주는 사치와 낭비벽이 심한 터라 결혼 후 3천만 원의 빚더미에 앉게 되었고, 채무를 변제하기 위해 유괴를 계획하게 된다.


박나리 양의 어머니 한영희 씨는 범인의 검거 소식에 딸을 찾을 수 있으리라 굳게 믿으며 경찰서로 달려가 취재진들 앞에서 감사 기도까지 하였지만, 머지 않아 딸이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되었다는 소식에 충격에 빠지고 사당동 어디냐고 외치며 넋을 잃은 그 모습이 지상파로 전국에 방영되었다. 당시 박나리 양은 서울원촌초등학교 2학년 5반에 재학 중이었는데, 사망 소식이 알려지자 원촌초등학교의 학생들은 분노와 슬픔을 감추지 못했다. 전현주의 자백에 따라 창고를 수색한 경찰은 심하게 부패한 박 양의 시체를 발견했다.

유괴 소식에 PC통신을 중심으로 박초롱초롱빛나리 찾기 운동이 벌어졌고 지상파 뉴스에서도 범인의 육성을 들려주며 캠페인에 동참했다.

단독 범죄로 결론났으나 남편은 물론 박나리 양의 유족들까지도 전현주의 체포 직후부터 전현주의 단독 범행을 믿지 않았으며 의문을 제기했다. 전현주가 체포될 때 남편은 망연자실해 그 자리에서 주저앉았다고 한다. 이후 사건 현장인 사당동의 지하 창고에서 그가 범행 당시의 상황을 재연할 때 "현주야 사실대로 말 해! 너 아니잖아 임마! 시키는대로 했잖아!"라고 울부짖는 남편의 절규가 지상파에서 방영되었다.


그 후


검거 후 범인은 자술서에서, 검찰에 검거되기 전 부모가 자신에게 5번이나 자살을 권유했다고 썼다. 부모는 "네가 속죄하는 길은 자살뿐이며, 우리도 곧 따라갈 테니 두려워하지 말라"라며 약국에서 살충제까지 구입해줬다고 한다. 그래서 검거 당시 여관 내부를 촬영한 뉴스 영상을 보면 테이블에 살충제 병이 그대로 나온다. 딸이 홑몸도 아니고 임신까지 했는데도 자살을 권했다는 점에서, 부모가 얼마나 자포자기 심정이었을지 짐작할 수 있다. 경찰 조사 도중 전현주는 그런 부모가 걱정되었는지 동생에게 "부모님을 잘 보살펴드리고, 자살하지 못하도록 막아달라"라는 당부의 편지를 쓰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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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인은 전문가들에 의해 연극성 성격장애로 진단받았다. 진술 도중에도 증언을 번복하고 성폭행을 당했다거나 공범의 존재를 주장하는 등 동정심에 호소하고 자신의 죄질을 낮추고자 온갖 이유를 동원해 변명하려 애썼다. 이때 공범이 있다는 진술이 언론을 타면서 뉴스에서 공범에 의한 2차 피해를 경고하기도 했으며, 끔찍한 범죄를 도와준 공범들의 존재를 믿었으나 얼마 후 임산부의 단독 범행이라는 게 다시 밝혀지며 사회는 더욱 충격에 빠졌다.



서울지검은 진술조차 거짓을 반복하는 전현주의 죄질이 매우 불량하다고 판단해 사형을 구형했고, 1심에서 사형이 선고되었지만, 결국 항소심에서 감형되어 무기징역이 확정되며 53세인 현재까지 교도소에 복역 중. 2000년대 초반 무렵까지 이런 극단적인, 사회적 쇼크를 준 사건에 있어서 판사가 피고인을 유죄로 보고 양형에 하는 때에는 사형을 선고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는 점에서 당시에 상당히 이례적인 판결이라고 평가받았다고 한다.범인인 전현주가 임산부 상태였기 때문에 사형을 집행하게 될 경우 태아까지 같이 처형시키는 꼴이 되기 때문에 이제 태어날 아기를 살게 해주기 위해서 무기징역을 선고한 것이라는 이야기도 있는데, 사형수가 임신한 경우 출산 후까지 기다렸다가 집행한다는 법조항이 이미 있기에 잘못된 주장이다.



전현주는 그 뒤에 경찰병원에서 딸을 낳았으며, 남편이 곧바로 아이를 데려갔고 이후 미국으로 입양을 보냈다고 한다. 통상적으로 범죄자가 임산부일 경우 인근 병원에서 출산 후 바로 주변 가족에게 인계한다. 가족이 없을 경우 어쩔 수 없이 교도소에서 아이를 키우게 되며 18개월 후에 보육원으로 보내진다.

죄질도 불량하고 국민적 공분을 샀던 탓에 형집행정지를 2주만 받았다고 한다. 통상 임산부 수형자들이 출산을 하면 한달 동안 형집행정지를 해주는 것을 감안하면 절반 이상 기간을 줄였다.


여담


박초롱초롱빛나리 양의 이름은 별처럼 빛나는 사람이 되라는 뜻으로 박 양의 아버지가 직접 지어준 이름이라고 한다. 아기의 점을 보러 갔는데 무당이 단명한다고 말해서, 이름을 길게 지으면 지을수록 장수한단 말이 있어서 이름을 길게 지었다는 설도 있다.


몇 번의 유산 끝에 간신히 얻은 첫 딸이었기에 정말 귀하게 키웠다고 한다.박 양은 부친이 지어준 이름에 걸맞게 연예인이 장래 희망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어린 나이에 참혹한 범죄의 희생양이 되어 세상을 떠나면서 영영 그 꿈을 이루지 못하게 되었다.
피해자는 유괴 9일 후인 1997년 9월 8일이 만 8세를 맞이하는 생일이었는데, 이 당시 아이의 행방이나 생사 여부를 알 수 없었기 때문에 가족들은 어느 때보다도 슬픈 생일을 맞이해야 했다. 가족들은 주인 없는 생일상을 차리고 무사 귀환을 기원했지만 나흘 후 범인이 검거되며 피해자가 생일을 맞지도 못하고 유괴 직후 숨을 거두었다는 사실이 밝혀져 안타까움을 더했다. 결국 화장되어 대천해수욕장에 유해가 뿌려졌다.

긴 이름은 단명한다?


이 사건 이후로 길거나 눈에 잘 띄게 아이의 이름을 짓는 사람들이 줄었다고 알려져있으나, 이 사건이 일어나기 4년 전인 1993년에 이미 성을 제외한 이름을 5글자 이내로 제한하는 규정이 실시되었기 때문에 이 사건과는 관련이 없다. 게다가 이름이 너무 길 경우 해외여행 때 여권을 만드는 데에도 문제가 있다. 서양권의 경우 한국어 음독이 길더라도 로마자 자체로는 적당한 선에서 유지되는 경우가 많은데, 박초롱초롱빛나리의 경우 지나치게 길어서 여권 만드는 데 문제가 있을 수 있다. 물론 여권 첫 번째 줄의 신상 정보란에는 초롱초롱빛나리를 로마자로 풀어서 쓸 경우 들어갈 공간은 있다.
정 이름을 길게 짓고 싶다면, 호적에 등재하기 위해 짓는 5글자 이내 이름과, 집안 혹은 친한 이들끼리만 통용하는 긴 이름을 둘 다 사용한다. 그리고 한때 이름이 길면 단명한다는 속설이 돌기도 했다.

낯선사람 교육이 아닌 "안전행동"으로 교육 방식 변경


전술한 대로 범인이 임산부로,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선입견 그대로의 '낯선 사람'(예: 무섭게 생긴 남자)이 아니었던 터라 아동 교육학계에선 '낯선 사람 조심'식 어린이 유괴 방지 교육에 대한 문제점이 제기되기도 했다. 이미 서구 선진국들은 1980년대부터 '낯선 사람 조심' 교육을 포기하고 '안전한 행동(protective behavior)'으로 교육 방식을 변경했지만, 한국은 당시 이러한 인식이 널리 퍼져있지 않아 해당 사건 후 이와 유사한 어린이 범죄 사건이 빈번해졌다. 2000년대 후반에 들어서야 새로운 '안전생활 교육' 열풍이 퍼졌다.
젊은 임산부가 유괴범이라는 설정은 친절한 금자씨의 모티브가 되었다고 회자된다. 실제 전현주는 재판 과정에서 공범이 있으며 성폭행을 당해서 범행을 저지르게 됐다고 거짓 진술을 하여 언론에서 대대적으로 보도되기도 하였다.

금융실명제법 이후 자취 거의 감춰


80-90년대 횡행했던 금품요구를 목적으로 한 어린이 유괴살인사건이 이 사건을 마지막으로 거의 자취를 감추었다. 사실, 이미 93년부터 금융실명제가 실시되면서 유괴범죄의 필수품이었던 가명 통장계설이 불가능하게 되자 어린이 유괴범죄가 주춤하기 시작했고, 97년만해도 은행을 비롯한 거의 대부분의 공공장소에서 본격적으로 CCTV가 설치된 상황이었고, 정보통신 추적 기술이 본격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하면서 이러한 범죄의 성공가능성이 매우 희박해지면서 당시에도 거의 사라져가는 상황이었다. 1978년 정효주양 유괴사건을 시작으로, 82년 이윤상군, 91년 이형호군 유괴사건 등 피해아동 실명을 딴 수많은 OOO 유괴사건도 97년 박나리양이 마지막이었다. 물론 그뒤로 이런 범죄가 100% 전혀 일어나지 않았다는 얘기는 아니지만 더이상 우리사회에서 큰 주목을 받지 못할만큼 매우 드문 범죄가 되어버렸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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