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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이야기

<오카다 유키코>프로필,데뷔부터 죽음까지 스토리おかだゆきこ, OKADA YUKIKO

by 프리디와이♡ 2022. 12.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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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카다 유키코 프로필

오카다 유키코


출생
1967. 8. 22. 일본
사망
1986. 4. 8.
신체
155cm, 45kg
데뷔
1984년 [첫번째 데이트]
수상
1984년 제11회 FNS가요제 신인상
1984년 제10회 일본TV음악제 신인상
1984년 제14회 긴자음악회 대상
1984년 제17회 신주쿠음악제 금상

어린시절

오카다 유키코

아이치현 이치노미야시 출생이나 자라난 곳과 고등학교 때까지 생활한 곳은 일본의 3대 신사 중 하나라 불리는 아츠타 신궁이 있는 나고야시 아츠타구이다. 제왕절개에 이른 난산으로 태어나 태어난 직후엔 47cm, 2.7kg의 미숙아였다. 유소년기에는 언어장애까지는 아니었으나 '사(さ)행'을 발음하지 못해 '선생님(센세)'를 "텐테"라고밖에 발음하지 못했다. 가수가 되기로 결심하기 전에는 독서와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고 학업에 크게 집착하지는 않았던 평범한 소녀였다.

오카다 유키코
1981년(쇼와 56년) 니콘에서 주최한 '프레쉬 걸 콘테스트'에 응모하여 게재된 광고

초등학생 때는 그림 그리는 직업을 동경하여 수채화, 중학생 때부터는 유화와 일본화를 배우기 시작하며 본격적으로 화가가 되는 것을 꿈꾸었다. 중학교 2학년 때는 평소 동경하던 여성 아이돌 카와이 나오코의 초상화를 그려 본인에게 직접 보내려고 하였다.(이는 데뷔 후에 방송에서 공개되었다.) 한편 연예계 또한 동경하던 그녀는 초등학교 6학년 연극부에 가입, 학예회에서 옛날 이야기 모모타로의 오토히메역을 맡게 되었는데, 그 연극은 교장까지 보러올 정도였다고 한다. 이것을 계기로 중학생이 되어 유수한 아이돌을 배출한 '호리프로 탈렌트 캐러반' 등의 오디션에 응모하게 되었고 중학교 2학년 때인 1981년(쇼와 56년) 니콘에서 주최한 '프레쉬 걸 콘테스트'에 응모하여 준그랑프리를 차지하게 된다.

엄친딸의 데뷔 조건

그러던 중 1982년(쇼와 57년) 8월, 가수가 되기 위해 닛폰 테레비의 예능 신인 발굴 프로그램 스타 탄생! (スター誕生!)[8]에 출전하기로 결심하는데, "대회에 나갈 생각이라면 학생기록부를 써주지 않겠다."라고 학교 선생님에게 반대 당했으나 학교를 무단 결석하고 나고야 지역 예선 대회에 나가 결승 티켓을 손에 넣는다. 그러나 선생님 뿐만 아니라 부모님을 포함한 모든 가족 또한 결사반대하여 12월에 열린 결승 대회는 출전하지 못했고, 그 여파로 식사도 거르고 방 안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자 보다 못한 가족들이 3가지 조건을 걸고 이 조건을 전부 해내면 출전을 허락하기로 한다.

오카다 유키코


그 조건이란,
1. 교내 테스트로 학년 1등급을 딸 것

2. 중부지역 통일모의고사에서 전교 5등 안에 들 것

3. 나고야 시립 코요고등학교에 합격할 것

상기한 세 가지 모두 대단한 조건이지만 특히 두 번째는… 어떤 의미로 엄친딸이었다. 부모님으로서는 일부러 무리한 조건을 걸면 딸이 하다가 지쳐 포기할 것이라고 생각한 듯 했지만 유키코는 그 날 이후 매일같이 새벽 2~3시까지 책상에 앉아 공부에 전념하여 놀랍게도 세 가지 조건을 전부 해내고, 이듬해 1983년 결승 대회에 출전하여 당당히 합격. 저명한 여러 개의 소속사의 오퍼를 받았으나 선 뮤직 프로덕션의 후쿠다 전무의 눈에 띄어 부모님에게 각고의 설득을 한 끝에 계약을 맺고 가수로 데뷔하게 된다. 이 때 오디션 예선과 결승전인 '스타 탄생'에서 각각 부른 노래가 키타하라 사와코의 MY BOYFRIEND와 나카모리 아키나의 슬로우 모션.

1984년 일본을 대표하는 싱어송라이터 타케우치 마리야가 작곡한 '퍼스트 데이트(ファースト・デイト)'로 데뷔, 그 해 신인상을 수상했으며 노래와 연기 모두 좋은 반응을 얻으며 활동했다. 데뷔하고 나서는 줄곧 사무소 선배이자 톱 아이돌인 마츠다 세이코와 비교되며 포스트 마츠다 세이코, 제2의 마츠다 세이코라고 칭해져 왔으나 본인은 "역시 자신은 자신일 뿐이니까, 마츠다 세이코를 따라가고 싶지 않다."고 얘기하였다. "목표로 하는 가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는 '오카다 유키코'라고 자신을 들기도 하는 등 어린 나이에 프로듀서 등에게 좌지우지되는 일이 많은 연예계에서 확고한 생각을 가지기도 하였다.


오카다 유키코

귀엽고 청순해보이는 외모와는 달리 데뷔 초부터 똑똑하고 총명한 면모도 돋보였는데 음반 영업소에 인사차 그녀를 데리고 갔을 때에, "애인이 있으신 분들은 1/3을, 사모님이 계신 분은 1/4이면 되니까 자신에게 애정을 주세요." 라고 했다고 하는데, 어린 소녀가 영업직 앞에서 귀여우면서 능글맞게 말하는 것을 보고 다들 놀랐다고 한다.

그러나 늘 근면성실한 타입인데다 남들에게 지기 싫어하고 스스로에게 엄격한 완벽주의 성향이 있어서 고된 연예인 생활 동안, 또래의 아이돌에 비해 자신을 굉장히 몰아붙이면서 일을 했다고 한다. 살이 쉽게 찌는 체질이어서 다이어트의 긴장을 늦출 새가 조금도 없었고, 시력이 좋지 않았음에도 콘텍트 렌즈의 부작용을 염려하여 렌즈를 착용하지 않았다. 게다가 빠듯한 스케줄의 연속으로 하루에 3~4시간 정도 밖에 수면을 취하지 못했다. 한참 인기를 얻을 무렵, "요즘은 하루에 20시간 정도는 일하고 있어요."라고 밝히기도 했고 1985년(쇼와 60년) 12월에 과로로 병원에 입원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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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신자살 사건의 전말


1986년 4월 8일 오전 9시, 도쿄 미나토구의 미나미 아오야마 로터리 맨션. 6층의 거주자가 짙은 가스의 냄새를 맡았다.

통보를 받은 관리인은 가스의 누출이 어디인지 한 채씩 찾아 다녔고, 402호실에서 이상한 낌새를 눈치챘다.

초인종을 여러 번 눌렀지만 반응이 없고 다급해진 관리인은 보조키로 문을 열었다. 이 방의 거주자는 사토 카요(오카다 유키코의 본명). 차주는 선 뮤직 프로덕션. 보통 맨션이었고 출입도 자유롭지만 떠오르는 아이돌 스타였던 그녀가 이곳에 살고 있다는 사실은, 관리인 외에는 철저한 비밀이었다.

관리인은 체인락 때문에 더 이상 열지 못하고 "사토 씨 괜찮습니까?" 라고 여러 번 외쳤지만 반응은 없었다.

오전 10시 9분. 관리인의 연락을 받은 경시청이 아카사카 소방대원을 대동한 채 출동하고 소방대원이 체인락을 절단한 후에야 현장으로 진입할 수 있었다. 실내에는 강한 가스 냄새가 진동했고, 한 가운데 한 명의 소녀가 왼손에서 피를 흘린 채 울고 있었다.왼손에는 커터 칼로 자른 듯한 5cm의 자상이 두 개나 있었고 주변엔 그녀가 흘린 피가 흥건히 고여 있었다.

구급차에 실려 인근 병원에 급히 호송된 오카다. 곧 바로 왼손의 상처를 봉합수술로 치료하고 신경안정제를 투여. 의외로 침착한 그녀의 반응에 의사는 곧바로 퇴원이 가능하다고 판단을 내린다.

오카다 유키코 자살당시 건물


당시 휴가를 얻고 있던 오카다의 매니저 미조구치는 회사의 사장인 아이자와와 또 다른 매니저 야마구치에게 이 사실을 알렸고, 두 사람은 11시가 넘어서야 병원에 도착해서
오카다와 대면했지만 그녀는 자살 이유에 대해선 함구한 채 울기만 할 뿐이었다. 사무실에 있던 소속사의 후쿠다 전무는 아이자와 사장에게 "유키코가 큰일이다. 키타아오야마병원에 빨리 데리러 가달라"는 전화를 받고 병원으로 달려가 병실 커텐 안에서 손목에 붕대를 감싸고 울고 있던 유키코와 대면했다. 엉엉 울고 있기보다는 조용히 훌쩍훌쩍 울고 있는 느낌으로. 다행히도 깊은 상처가 아니었기 때문에 의사에게 입원할 필요는 없다는 말을 들은 후쿠다 전무는 유키코를 데리고 나와 택시에 오른다.

'어디로 가고 싶니? 나고야에 있는 집으로 돌아갈까? 자택 맨션으로 돌아갈까? 아니면 사무소로 갈까?'라고 묻자 유키코는 '사무소가 좋아요'라고 대답하여 사무소가 위치한 신주쿠의 요츠야로 향했다. 소속사 건물 6층에 들어오자마자 화장실에 가고 싶다는 오카다.

하지만 심상치 않은 그녀의 표정에 무언가를 눈치 챈 후쿠다 전무는 매니저인 야마구치와 사장 비서에게 철통 같은 감시를 지시하고 여기서 오카다의 2차 자살시도가 무위로 끝나는 듯 했다.

"딸기 주스가 마시고 싶어요." 오카다의 부탁에 후쿠다가 사장 비서에게 이를 부탁하고 감시인은 3명에서 2명으로 줄어들었다. 여기서 갑자기 전화를 해온 사장. 이미 자살 미수가 기자들의 귀에 들어간 상황에서 향후 대처를 의논하기 위해 후쿠다는 오카다의 옆을 떠나며 야마자키에게 신신당부를 한다.

둘만 남게 된 오카다와 야마자키. 순간 생수를 엎지른 오카다.

"가만 있어. 내가 티슈를 찾을 테니."

야마자키가 티슈를 찾는 일순간의 틈에 오카다 유키코가 없어진다.

"유키코가 없어졌습니다."

패닉에 빠진 야마자키가 옆방에서 사장과 전화 통화를 하던 후쿠다 전무에게 달려가 외쳤고, 다급해진 두 사람은 사내 건물을 돌아다니며 그녀를 찾았다. 바로 그때 휴가 중이던 오카다 유키코의 전담 매니저 미조구치가 택시를 타고 선뮤직 사옥에 도착했다. 12시 6분.

택시에서 내려 사옥으로 들어가려던 미조구치의 눈에 갑자기 검은 물체가 쿵 하며 떨어지는 것이 보였다. 직감으로 오카다 유키코가 떨어진 것은 아닌가 생각하고 다가갔지만 사람으로 생각되는 물체는 이미 머리통이 터져 하얀 뇌수가 사방에 흔재, 식별할 수가 없었다. 다만 언제나 그녀가 차고 있던 손목시계만이 그 물체가 오카다 유키코였음을 증명할 뿐이었다.

그녀가 자살한 선뮤직 사옥은 요츠야 4가의 교차로였기 때문에 사람들의 왕래가 많았고, 오카다가 먹고 싶다던 스트로베리 주스를 배달하기 위해 온 웨이트리스는 사체를 보고 기겁. 구토를 해댄다.

"유키코, 유키코!" 눈물을 쏟아내는 미조구치.

매니저로서 그녀의 참담한 사체만은 매스컴에 노출시키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에 미조구치는 회사에 올라가 모포를 가져와서 조각나고 터진 머리와 뇌수를 주워 담으며 사체를 수습한다.

사건직후

오카다 유키코 추모

시신이 수습되고 난 직후 보도를 듣고 전국에서 몰려온 수백명의 팬들은 사건 현장의 시신이 있던 자리에 모여 묵념하듯 아무런 말도 없이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있었고 이윽고 젊은 청년들이 울부짖는 현장으로 변했다. 그들이 가져온 꽃다발이 쌓이고 쌓여 2미터에 이르렀다. 황색언론 잡지인 프라이데이와 포커스는 모자이크 처리도 되지 않은 적나라한 시신의 사진을 날 것의 묘사와 함께 그대로 잡지에 실었다.

자살이 확실한 상황이라 검증만 했을 뿐 부검은 진행되지 않았다. 저녁이 되어 고향인 나고야에서 유키코의 부모가 올라와 요츠야서는 눈물바다가 되었다. 이 날은 모든 방송에서 오카다 유키코의 죽음에 대한 기사와 방송이 밤까지 연이어졌으나, 단 한 곳 테레비 아사히의 간판 뉴스 채널 '뉴스 스테이션'에서는 아나운서였던 쿠메 히로시가 "연쇄 반응을 일으킬 염려가 있기 때문에 자살 관련 보도를 절제하였습니다"라는 멘트와 함께 사건에 대한 보도를 일체 하지 않았다.

사건 직후 연예계에서는, 오카다가 첫 정규 출연을 했던 버라이어티 방송에서 사회자가 오카다의 인물상에 대해 이야기를 꺼내며 추모 방송을 내보냈으며 그녀를 귀여워했던 선배 가수 콘도 마사히코와 나카모리 아키나가 출연해 눈물을 보였다. 4월 10일 음악 방송 '더 베스트텐'에서는 사회자인 쿠로야나기 테츠코가 시청자를 향해 “유키코씨의 밝은 미소가 우리의 마음에 남아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유키코 씨, 정말 감사했습니다”라며 눈물을 흘리며 회상하는 시간을 가졌고, 음악 버라이어티 '가요 깜짝카메라 대방송'은 그녀가 생전 마지막으로 녹화를 마친 방송이었기 때문에 추모하는 자막을 띄워 보냈다. 이 사건은 동년 2월 발생한 나카노후지미중학교 이지메 자살 사건과 맞물려 청소년 문제로 발전하였기 때문에 일본 국회에서도 다루어질 정도였다.


사건1시간 뒤 소속사 사장인터뷰

오카다 유키코

사건 직후 1시간 뒤 아이자와 사장은 곧바로 기자회견을 열었다. 소속사 선 뮤직 프로덕션의 사장이자 현재는 고인인 아이자와 히데요시가 오카다 유키코의 사후 밝힌 인터뷰 내용은 다음과 같다.

"당일, 제가 치과에 갔다가 돌아오니 사무실 빌딩 아래가 엄청나게 소란스러웠습니다. 유키코가 투신 자살을 했다는 겁니다. 저를 기다리던 유키코가 아침에 있었던 자살 소동에 대하여 제게 무슨 말을 듣는 것이 싫어 옥상으로 올라가 뛰어내린 거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녀가 남긴 하나의 일기풍 노트가 발견되어 그것을 읽고 나니 자살의 진상이 이해가 되었습니다. 그 노트에는 상대 남성의 이름(같은 드라마에 출연한 배우 미네기시 토오루)은 물론 그녀가 그 남성을 떠올리면서 기뻐하는 모습들이 적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스스로도 이루어질 수 없다고 생각한다며 풀솜으로 목을 조르는 듯이 괴롭다고 극명하게 쓰여 있었습니다."
"유키코는 미네기시씨에게 연심을 품고 플라토닉한 사랑을 계속 이어오다 자살했습니다."

인터뷰에서 아이자와 사장은 오카다 유키코의 자살 원인이 미네기시 토오루에게 품어왔던 연심이 원인이었다고 밝혔다. 이후에도 사장은 아직도 사무실에 오카다의 사진을 걸어놓고 휴대전화의 배경이나 수첩에도 오카다 유키코의 사진을 갖고 있으며 '선뮤직이 있는 한 오카다 유키코는 영원하다'고 오카다 유키코를 아끼는 마음을 간접적으로 표현했다.

같은 기자회견에서, 유키코와 생전 마지막으로 대면했던 후쿠다 전무는 "기자회견 당시엔 정말로 괴로웠다. 하지만 아이자와 사장과 기자의 질문엔 정직하고 전부 대답하자고 서로 이야기하였습니다. 배우와의 교제가 원인이 아닌가라는 기자들의 질문을 받았지만 진상은 알 수 없다. 내가 알고 있는 건 유키코는 정말 멋진 아이였다는 것. 장례 때 그녀의 아버지가 '짧은 인생이었지만 인생을 응축한 것같은 행복한 아이였습니다'라는 얘길 해주셨습니다. 아이자와 사장도 저도 그 말에 얼마나 구원을 받았는지 모릅니다."라고 후에 회상하였다.


사망 후..

사망 후에는 그녀가 맡고 있거나 예정 중이었던 모든 스케줄이 중지되었다. 사건의 악영향을 우려해 사망 전날 발매한 사진집은 모두 회수되었으며 오카다가 집필하여 실릴 예정이었던 연재 소설도 게재가 중지되었다. 4월 12일 고향인 나고야에서 열린 전국 콘서트는 생전 마지막 방송을 함께 한 소속사 선배이자 동세대 아이돌 하야미 유가 미국 스케줄을 캔슬하고 대역을 맡았고 시즈오카의 콘서트에서는 소속사의 최고 선배인 모리타 켄사쿠가 아이돌인 이토 츠카사와 함께 대역으로 진행하였다. 오사카의 콘서트는 중지되었다. 그러나, 그녀의 사망 후에도 인기의 바로미터로 불리웠던 브로마이드 포스터의 판매는 계속 되었으며 한동안 판매 인기 순위에서도 5위 이하로 떨어진 날이 없었다고 한다.


오카다 유키코 무덤


미조구치 매니저의 바람대로 그녀가 사망한 신주쿠 요츠야 교차로 앞에는 매년 4월 8일마다 팬들이 꽃과 그녀의 사진, 앨범 등을 가지고 나와 추모하는 자리를 만들고 있다. 또한 아이치현 아이사이시 조만지(成満寺)에 잠든 그녀의 묘에는 35년이 넘는 세월동안 활짝 핀 신선한 꽃이 단 한번도 마를 날이 없이 장식되어 있다고 한다.


출처 및 참고:나무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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