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등사에 관하여
전등사는 강화에서 가장 큰 절이다. 일찍이 삼랑성 안에 창건되어 강화의 역사를 더불어 열어 왔고 숨가쁘게 달려왔다. '강화' 하면 전등사를 꼽는 까닭이 단지 문화재를 비롯한 볼 거리가 많아서만은 아닌 것이다.
전등사의 창건설은 멀리 고구려 시대로 올라간다. 고구려 소수림왕 2년(372), 아도화상이 신라의 일선군(一善郡, 지금의 경북 선산)에 불교를 전파하기 전, 이곳 강화 전등사의 개산조가 되었다는 유서 깊은 설이 있다. 당시의 절 이름은 진종사(眞宗寺)였다고 전한다. 지금 전등사에 고려 중기 이전의 기록은 전해지지 않지만 충분히 가능한 얘기다. 당시 이곳은 백제 땅, 아도화상은 태백산 줄기를 타지 않고 평양에서 이곳 백제로 곧장 내려와 신라로 들어갔을 가능성이 훨씬 더 많다.
현재 전등사로 들어가는 문은 둘이다. 전등사 정문인 삼랑성문이 동문이고 남문이 외돌아 있다. 즐비하게 늘어선 가게들을 뒤로하고 삼랑성문을 들어서면 오른쪽에 양헌수 장군의 승전비가 서 있다. 이 또한 절집에서 만나는 색다른 정서이지만 바로 이런 모습들이 강화 전등사가 걸어온 기념비적 역사이다.
울창한 나무 아래로 한참을 걸으면 대조루에 닿는다. 대조루를 비껴서면 그림 같은 대웅보전이 눈앞에 다가서는데 다포집의 우아함을 한껏 드러내고 있다. 이 건물의 특징은 창방뿌리에 연꽃을, 공포 위 보머리에 도깨비를, 그리고 추녀 밑에는 나체의 여인상을 조각해놓았다는 점이다.
전형적인 산지 가람배치를 따르고 있는 전등사는 보물 제178호인 대웅전이 정남을 향하고 있다. 그 왼쪽 옆으로는 대웅전과 같은 형식으로 지은 약사전이 있어 마치 두 채의 대웅전을 보는 느낌이다. 1880년에 조성한 대웅전의 후불탱화, 1544년 정수사에서 개판한 법화경 목판 104매, 중국 북송 때 주조한 범종, 고려시대 유물로 보이는 청동물동이, 대웅전에 불을 밝혔던 옥등이 값진 유물로 남아 있다.
전등사에 관한 기록은 고려 원종 5년(1264) 5월 삼랑성 가궁궐에 불정도량과 오성도량을 4개월간 시설케 하고 법회를 열었다는 『고려사』의 기록이 처음이지만, 이때까지도 '전등사'라는 절 이름은 등장하지 않는다. 다만 이곳에 가궁궐이 있었음을 알 수 있고, 왕실과 매우 가까운 절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 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승(僧) 인기(印奇)에게 부탁해 바다 건너 송나라에 들어가 대장경을 인출해다 '전등사'에 보관케 했다"는 기록이 비로소 나오는데, 그 주인공이 충렬왕비 정화궁주1)였다. 목은 이색(1328∼1396) 또한 전등사가 정화궁주의 원찰이었음을 밝히고 있다.
정화궁주가 송나라에 스님을 보내 대장경을 인출해 오던 시기는 강화에서 개경으로 환도한지 12년 뒤인 1282년이었다. 이로써 고려 고종이 삼랑성에 세웠다는 그 가궁궐이 그대로 전등사가 된 것은 아닌가 하는 추측이 가능해진다. 또 하나 정화궁주가 옥등을 시주해 전등사라 불렀다지만, 그보다 진리의 등불은 시공(時空)에 구애됨 없이 꺼지지 않고 전해진다는 불교 본래의 의미로 '전등사'(傳燈寺)라 불렀음이 가장 타당할 것이다.
숙종 4년(1678), 조정에서 실록을 보관하기 시작해 사고(史庫) 역할을 하면서 전등사는 조선왕조와 더욱 깊은 연관을 맺게 된다. 1707년 강화유수 황흠은 사각(史閣)을 고쳐 짓고 별관을 지어 취향당이라 이름했으며, 이곳을 왕조실록과 왕실의 문서를 보관하는 곳인 보사권봉소(譜史權奉所)로 정한다.
전등사의 최고 스님에게 도총섭의 직위를 부여한 것은 1719년부터 1910년까지 계속되었는데, 으레 전시를 염두에 두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749년에는 도총섭을 지휘자로 중수불사를 했는데, 이때 대조루도 함께 건립되었으며, 대개 영조의 시주로 이루어졌다. 고종 8년(1871)에는 전쟁에 대비한 무기보관소 포량고(砲糧庫)를 두었으며, 이듬해에는 승군 50명과 총섭 1명을 두고, 왕실에 진상하는 약초를 보관하기 위해 진상약애고(進上藥艾庫)와 산성별장소(山城別莊所)를 설치하였다. 산성별장소는 산성을 수비하는 종9품의 무관이 항시 주둔하는 곳이었으니, 신미양요·병인양요를 맞아 군비를 더욱 강화하고 왕실을 튼튼히 하려는 것이었다.
경내에는 그때의 장사각터, 선원보각터, 군창터 등이 남아 있어 특히 전시에 특수기지 역할을 했던, 강도 시대에 격동의 역사와 함께했던 전등사를 보는 듯하다. 고려 가궁궐터로 추정되는 곳도 요사채 위쪽으로 있다.
경내에는 그때의 장사각터, 선원보각터, 군창터 등이 남아 있어 특히 전시에 특수기지 역할을 했던, 강도 시대에 격동의 역사와 함께했던 전등사를 보는 듯하다. 고려 가궁궐터로 추정되는 곳도 요사채 위쪽으로 있다.
전등사는 일제 강점기인 1912년, 전국 6개군의 34사찰을 관리하는 본산이었다. 그런데 그 관리가 만만치 않아 드넓은 절터를 팔아 없애는 지경에 이르러 오늘날의 전등사로 축소되었다.
대웅전
현재의 대웅전은 조선 광해군 13년(1621)에 지은 것으로 되어 있으나, 조각 기법은 그보다 한참 후대의 발전된 모습을 보여준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겹처마 팔작지붕 건물로 한눈에도 퍽 안정감이 있고 우아하게 느껴진다. 막돌 허튼층쌓기로 높은 기단을 만들고 그 위에 역시 막돌로 초석을 놓았다. 다소 굵은 원흘림기둥을 안정감 있게 세우고, 모서리 기둥 높이를 약간 추켜세워 처마끝이 날아갈 듯 들리도록 했다.
이 건물은 조선 중기 이후의 다포집 형식과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는데, 여기에다 전등사만의 독특한 변화를 준 것이 있다. 곡선이 심한 지붕과 화려한 인물상을 조각해 얹은 점이다. 공포 위로는 동물조각·귀면·연꽃봉오리가 눈에 띄고, 발가벗은 여인이 쪼그리고 앉아 힘겹게 처마를 떠받치고 있는 모습이 애처롭기에 앞서 매우 해학적이다. 사랑에 배신당한 도편수의 증오가 부처의 넓은 도량에서 예술로 승화되면서 전등사만의 특별한 양식이 된 것이다.
법당 안으로 들어서면 정교하고 아름답게 목조각으로 조성된 불단 위에 석가모니 삼존불이 모셔져 있고, 그 뒤로는 고종 17년(1880)에 조성된 후불탱이 안치되어 있다. 삼존불 위로는 화려하고 귀품 있는 목조 닫집에, 능숙한 솜씨로 조각한 용·극락조 등이 부처님을 외호하고 있다. 불단 양 옆에는 목조 사자가 동판의 업경대를 업고 있어 참배객의 삶을 돌아보게 한다. 천장은 화려하게 채색된 우물 천장이고, 법당 내부는 화문(花紋), 비천문(飛天紋)의 조각과 연꽃단청으로 섬세하고 아름답게 꾸며져 있다. 보물 제178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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