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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이야기

시인들의 시인이었던 '백석'그리고 말년의 북한에서

by 프리디와이♡ 2022. 2.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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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시절의 백석

시인들의 시인 '백석'

백석의 젊은 시절

대한민국 사람들이 가장 많이 사랑하는 시인으로는 윤동주가 많이 거론되는데, 그런 윤동주가 존경하고 시인으로 생각했던 시인은 '백석'이다. 백석..그 이름은 윤동주처럼 많이 알려지진 않았다. 나도 최근에 되서야 시인의 시인으로 불리우는 사람이 백석이란 분인걸 알게 되었다. 아마도 백석이 대한민국에 살지 않고 북한에 살았기 때문에 한때는 월북 작가라고 오인받아 언급을 피했다고 한다.
백석은 1936년 '사슴'이라는 시집을 내었는데 총 100부밖에 발행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마져도 공식 발행이 아닌 그를 아는 사람들만을 위한 발행이었다고 한다. 총 33편 4부로 나누어져 있는데 윤동주 시인도 이 시집을 구하고 싶었으나 구하지 못해 자신이 직접 필사를 했다고 한다. 윤동주의 시를 보면 백석의 필체나 분위기가 비슷한것들이 많았다고 한다. 그리고 '노천명'의 시 '사슴' 역시 백석의 별명이기도 한 '사슴'에서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백석이 시인으로서 얼마나 대단했는데 짐작해 볼 수 있음이다.

모던 보이

백석을 가르치던 독립운동가 조만식이 당시 백석을 보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내가 아는 백석은 성적이 반에서 3등 정도 였으며 문학에 비범한 재주가 있었다. 특히 암기력이 뛰어나고 영어를 잘했다. 회화도 썩 잘해 선생님들에게 칭찬을 받았다. 백석은 용모도 준수했지만 나이가 어린 편이었다.(나이가 어렸지만 용모도 출중하고 재주가 비범했다.) 백석은 부친을 닮아 성격이 차분했고 친구가 거의 없었다."
또 백석이 신문사에서 근무할때 그는 결벽증이 심한 멋쟁이로 통했다고 한다. 다른 사람들이 당시 20~30전 짜리 양말을 신을 때 백석은 1원이 넘는 양말을 고집했고 최고급 양복을 입고 최고급 구두를 신었다고 한다. 절대 양말 하나도 허투로 고르지 않았다고 한다. 지저분한 식당은 출입하지 않았고 전화기를 받을때에도 손수건으로 수화기를 감싸고 통화했다고 한다. 후에 문화평론가 '백철'은 <1930년대의 문단>에서 "백석은 얼굴색은 거무스레 했는데, 스타일은 여간한 모던보이가 아니었다."고 회상했다. 지금 그의 사진을 봐도 잘생긴 얼굴과 세련미 넘치는 헤어스타일과 옷차림에서 그가 멋을 아는 멋쟁이 였음을 짐작 할 수 있다.

북한에서의 삶

북한에서 가족들과 함께 노년의 백석


백석은 월북시인으로 대한민국에선 출판금지를 당했다. 그래서 그의 이름은 대한민국에선 거의 언급되지 못하였다. 그의 고향이 평안북도 정주이다. 해방 후 오산학교의 교장이었던 독립운동가 조만식의 통역비서로 일하게 되면서 평양에 머무르게 되었다. 조만식은 신탁통치 문제로 김일성과 의견충돌이 있었고 고려호텔에 감금됐다가 생사 불명이 되었다. 아마도 이때 백석의 입지 또한 많이 힘들었으리라는게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백석은 북한에서 러시아 번역작가와 아동작가로 활동했다.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의 러시아 번역가로서의 능력은 최고였다고 한다. 지금까지도 북한의 문학은 공산당의 주체사상을 홍보하는 역활을 하였기에 백석이 아동작가로 활동했으리라 이야기가 있다. 아동작가로 활동하던 백석은 <기린>이라는 작품을 끝으로 더이상 활동을 하지 않고 문학계에서 사라지게 된다. 한국에 다시 돌아오고 싶었지만 조만식 선생도 모셔야 했고, 가족도 있고, 감시가 삼엄하여 돌아올 수 없었다고 한다. 돌아올 수 없는 그 처지를 이해하고도 남음이다. 백석은 1996년 사망하기 전까지 삼수군에서 양치기와 농사를 했는데 실력이 너무 형편없이 주변에서 웃음거리가 되었다고 한다.
백석의 노년의 모습은 젊었을때 모던 보이와는 너무나 다른 모습이다. 물론 나이들고 늙어서 그런이유도 있지만 더이상 펜을 들지 않고 노동자로서 힘들게 삶을 살다간 이유 일것이다. 마흔이 넘고 나이가 먹으면 살아간 세월이 얼굴에 묻어난다고 하지 않는가!! 시인의 시인으로 불리던 백석은 북한에 살면서 공산주의 사상에 부딪혀 활발한 문학활동을 하지 못하고 생을 마감했다. 백석 시인 또한 시대의 희생자 일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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