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밀라 로즈마리 파커 보울스
(Camilla Rosemary Parker Bowles)
출생
1947년 7월 17일 (75세)
잉글랜드 런던 킹스 컬리지 병원
학력
퀸즈 게이트 스쿨
런던 대학교 그룹 파리 분교
배우자
앤드루 파커 보울스 (1973년 결혼 / 1995년 이혼)
찰스 3세 (2005년 결혼)
영국 찰스 3세의 정부출신 왕비.
찰스 3세가 왕세자였던 시절부터 관계를 이어오다가 각자 다른 사람과 결혼을 하고 자녀까지 낳았음에도 불륜을 지속했다. 결국 이혼을 통해 늦은 나이에 서로 결혼했고 오랜 기간 내조를 통해 왕실과 국민으로부터 인정을 받게되어 왕비가 된 인물이다.
역대 영국 국왕 중 가장 고령(73세)으로 즉위한 찰스 3세 처럼 카밀라 역시 역대 영국 왕비 중 가장 고령(75세)으로 즉위한 왕비다. 덴마크의 알렉산드라(56세 즉위)가 갖고 있던 기록을 경신했다.
또한 조지 5세의 왕비 테크의 메리 이후 113년만에 웨일스 공비가 왕비로 즉위한 사례가 되었다.
어린시절
잘 부각되지 않지만, 귀족 혈통으로 다이애나 스펜서처럼 엄연히 상류층에 속하는 사람이다.다만 다이애나 스펜서는 백작의 딸로 명백한 귀족 출신이었으나, 카밀라는 남작의 외손녀였기 때문에 평민이라고 해도 무방하다.게다가 다이애나의 친정은 일개 귀족 가문이 아니라 유구한 역사를 지닌 명문 스펜서 백작가였으며,백작의 딸인 다이애나는 레이디(lady) 작위를 가진 반면, 카밀라의 어머니인 로잘린드는 남작의 딸로 한단계 낮은 아너러블(honourable) 작위를 가지고 있었다. 거기다 로잘린드가 작위없는 남성과 결혼했기 때문에 카밀라는 귀족이 될 수 없었다.
한마디로 '상류층이긴 하지만 작위를 보유한 귀족인 하이본은 아닌' 케이스인 것이다. 의전서열로 따져도 백작의 딸이 남작부인보다 높다.양판소의 영향으로 남작 작위가 상당히 하찮게 여겨지는 부작용이 생겨버려서 그렇지, 일단 유작귀족 자체가 영국 전체에서 얼마 되지 않는다. 다만 그 안에서도 서열이 갈리는 것 뿐이지 남작의 외손녀만 되더라도 흔히 보는 사람들은 아니며, 하다못해 준남작의 딸도 일반인들은 살면서 만나볼 일 없는 사람이다. 정리하자면 카밀라는 상류층으로서 좋은 병원에서 태어나고, 고급 교육만 받고 자랐지만 넘사벽인 최상류층 스펜서 백작영애인 다이애나에 비해서는 뒤쳐진다는 얘기.
찰스 왕세자와의 불륜
1971년 당시 친구의 소개로 찰스 왕세자를 만났다. 두 사람의 관계는 발전하여 연인이 되었고, 가족들에게 서로를 소개하기도 했다.
하지만 1973년 찰스가 입대하면서 두 사람은 헤어지게 된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설이 있다. 찰스가 카밀라에게 "기다려달라고 하지 않았다"라는 설도 있고, 외할머니 엘리자베스 보우스라이언이 스펜서 가문의 여자와 결혼시키고 싶어해서 헤어지게 만들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찰스가 군대에 가고, 그와 헤어진 이후 카밀라는 8살 연상의 앤드루 파커 보울스와 결혼했다.앤드루는 왕실 기병대 장교로, 카밀라와 결혼 당시에는 소령이었으며, 찰스 왕세자의 여동생인 앤 공주의 첫 남자친구이기도 했다. 카밀라와 앤드루의 결혼 소식은 찰스에게 큰 충격을 줬다고 한다.카밀라와 앤드루의 결혼식에는 엘리자베스 2세, 앤 공주, 마거릿 공주, 엘리자베스 왕대비가 참석하는 등, 당해 사교계에서 가장 큰 결혼식이었다.
하지만 "이때 찰스 왕세자가 카밀라와 결혼하고 싶어도 못했을 것이다"란 이야기가 많다. 재혼하고 왕비 자리에까지 오른 현재로서는 이해가 안 갈지도 모르나 당시엔 카밀라의 신분 자체가 미래의 왕인 왕세자와 결혼하기에는 적합하지 않게 여겨졌다고. 찰스 왕세자 이전까지 영국의 왕위 후계자는 모두 왕족이나 공족과 결혼했으니, 일개 남작의 외손녀였던 카밀라가 왕세자비가 되기에는 한없이 부족했을 것이다.게다가 당시에는 왕세자비 자리에 순결한 처녀를 원했는데, 카밀라는 찰스와 만나기 이전에 이미 여러 남자와 교제했다는 것이 문제가 되었다.
카밀라의 결혼 이후 찰스와 카밀라는 친구로 남게 되었다. 하지만 1979년 IRA 폭탄 사고로 찰스가 의지했던 루이 마운트배튼 경이 사망하자 찰스는 카밀라에게 깊이 의존하게 되었고, 카밀라는 앤드루와의 사이에서 아들 톰과 딸 로라를 낳았음에도 불륜 행각을 계속 이어갔다. 앤드루 또한 여러 여자들과 바람을 피우는 등, 두 사람의 결혼생활은 파국에 이르렀다.
찰스 왕세자와 카밀라의 불륜 행각은 10년이 지난 1992년 다이애나의 자서전이 발간되면서 세간에 알려지게 된다. 1993년에는 둘 사이의 대화를 폭로한 테이프가 언론에 공개되어 큰 파문을 일으켰다. 그리고 사실 오래 전부터 부부 사이가 끝난 것과 다름 없었기 때문에 1992년부터 공식적으로 별거에 들어갔다. 그러다 1996년에 다이애나가 BBC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찰스와 카밀라의 불륜 사실을 직접적으로 폭로하면서 어떻게든 이혼만은 막으려 했던 엘리자베스 2세가 포기하고 찰스를 불러들여 이혼을 지시했다. 그리하여 마침내 그 해 중순 찰스와 다이애나는 이혼하게 되었다. 겨우 자유를 되찾은 다이애나에게는 많은 동정과 응원이 따랐고, 찰스와 카밀라에게는 엄청난 비난이 쏟아졌다. 카밀라 또한 폭로의 여파로 인해 1995년 남편 앤드루와 이혼했고 앤드루는 1996년 로즈메리 피트먼이란 이름의 여성과 재혼했다.
설상가상으로 이혼하고 고작 1년 뒤인 1997년 8월 31일에 다이애나가 프랑스 파리에서 교통사고로 급사하면서, 다이애나를 아꼈던 영국인들과 전 세계 사람들이 비통해하며 찰스와 카밀라를 더욱 비난했다.특히 이 때 카밀라에 대한 비난 여론은 강렬했는데, 관계자들은 부인했으나 베이커리에서 카밀라를 알아본 사람이 빵을 던졌다는 소문도 퍼질 정도였다. 심지어는 당시에 카밀라와 찰스 왕세자를 우스꽝스럽게 표현한 종이 가면까지 출시되었다고 한다.
찰스가 몇십 년이나 카밀라와 불륜을 지속한 이유는, "카밀라와는 말이 잘 통해서"였다고 한다. 고등학교 중퇴였던 다이애나와 달리 카밀라는 학구열 높은 찰스 왕세자와 얘기가 잘 통할 정도로 교양도 있고 화술도 좋았다. 뿐만 아니라 카밀라는 왕실에 대해 잘 알고 왕실 어른들을 살뜰히 대우했기에 정작 엘리자베스 2세도 카밀라를 싫어하지 않았다고 한다. 오히려 국민들에게 맏아들 찰스보다 사랑받는 맏며느리 다이애나 스펜서를 견제했다는 말이 있다. 심지어 다이애나가 남편의 불륜 행각에 대해 시어머니에게 하소연하며 중재를 바랐을 때조차 엘리자베스 2세는 말로만 "왕세자는 구제불능이구나."라고 할 뿐 아들의 불륜을 방관했다. 남편의 불륜에도 불구하고 아들을 둘이나 낳고 최선을 다해 공무를 수행하는 등 왕실에 순종적이었던 다이애나는 왕실과 시어머니에 대해 큰 배신감을 느꼈을 것이다. 실제로 이혼 발표 후 다이애나가 매스컴에 대고 왕실에 들으란 듯이 "우리의 결혼 생활에는 늘 셋이 있어서 좀 시끄러웠어요."라고 인터뷰한 것은 그 때문이다.
콘월 공작부인이 되다
각종 스캔들로 망신살을 뻗친 카밀라는 찰스 3세와 재혼하기 위한 계획을 본격적으로 세우기 시작했다. 1995년 카밀라는 유명 홍보 전문가인 마크 블랜드를 커뮤니케이션 담당자로 고용했으며,1999년 런던 리츠 칼튼 호텔에서 열린 한 생일 파티에서 처음으로 찰스 3세와 공식석상에 함께 모습을 드러냈다. 이때부터 카밀라는 왕세자의 공식적인 연인이 되었다.
2000년부터는 찰스 3세의 공무에 동행하기 시작했으며, 2001년에는 국립 골다공증 협회의 회장으로 임명되었다.그리스 콘스탄티노스 2세 전 국왕의 60세 생일 파티에 찰스 3세와 동반 참석해 엘리자베스 2세를 만나기도 했다. 이처럼 몇몇 민간 행사에 모습을 드러낸 카밀라는 2002년 엘리자베스 2세의 재위 50주년 골든 주빌리 행사에 초대되어 왕족들이 앉는 로열박스에서 함께 콘서트를 관람했다. 2003년부터는 아예 클래런스 하우스에서 찰스 3세와 동거 생활을 시작했으며, 개인 보좌관까지 고용해 사실상 왕세자비와 다름없는 생활을 이어나갔다. 이렇다 보니 찰스와 카밀라의 재혼을 지지하는 여론이 조금씩 나오기 시작했다.
2005년 2월 10일, 클래런스 하우스는 찰스 3세와 카밀라의 약혼을 공식적으로 발표했다. 찰스 3세가 카밀라에게 준 약혼 반지는 할머니 엘리자베스 보우스라이언이 엘리자베스 2세를 임신했을 때 조지 6세가 선물했던 반지라고 한다. 당시 차기 왕위를 계승해야하는 왕세자가 이혼녀와 재혼하는 것이 적절한지를 두고 논란이 있었지만,엘리자베스 2세 여왕과 토니 블레어 영국 총리, 로완 윌리엄스 캔터배리 대주교가 모두 성명을 통해 지지 의사를 밝히면서 결혼이 성사될 수 있었다. 이후 결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어 약혼 발표 후 2개월 만에 결혼식이 열렸다.
찰스 왕세자의 현재 부인이므로 전하(Her Royal Highness)의 경칭은 받았지만, 국민의 반발 때문에 왕세자비(Princess of Wales) 칭호는 대외적으로는 사용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왕세자비라는 칭호가 다이애나를 대표적으로 의미하는 칭호여서 그런 듯 하다.대신 잉글랜드에서는 콘월 공작부인(Duchess of Cornwall)으로, 스코틀랜드에서는 로스시 공작부인(Duchess of Rothesay)으로 불렸다.
마침내 왕비가 되다
카밀라를 평생 지극히 사랑한 찰스는 결혼할 때부터 세간의 부정적인 반응은 모조리 무시한 채 "내가 즉위하면 카밀라가 왕비다"라고 공공연히 카밀라를 왕비로 만들어 주려고 선언하고 다녔다. 하지만 영국의 여론은 "찰스가 왕이 되는 사태가 일어나면 왕정을 폐지한다"는 여론이 컸다.
왕세자의 배우자 자리에서 인정받기까지 카밀라도 부단히 노력한 것은 분명하다.
2022년 6월, 엘리자베스 2세에 의해 가터 기사단 기사로 임명되었다. 왕비도 아닌 왕세자비가 가터 기사단에 임명되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따라서 카밀라가 왕비로 즉위할 가능성이 더욱 높아졌다는 예측이 나왔는데, 3개월 후 여왕이 사망하자 진짜로 왕비가 되었다.
4월 4일, 버킹엄 궁전에서 배포한 찰스 3세와 카밀라 왕비의 대관식 초대장에 카밀라 왕비의 칭호가 'Queen Consort'가 아닌 'Queen Camilla'로 표기되면서 대관식 이후 칭호가 Queen으로 변경되는 것이 확정되었다.
영국 국민들에게 불륜으로 비난 받았지만 어린시절만나고 찰스 왕세자가 대화가 잘 통해서 좋았다고 한다. 우여곡절 끝에 영국 왕비의 왕관까지 쓴 카밀라 왕비!
후에 다이애나 비와 삼각관계가 아닌 세기의 로맨스로 남지 않을까 싶다.
출처 및 참고:네이버,나무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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