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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이야기

현미 프로필,일생,이봉조의 일생,가수 현미와 이봉조의 사랑,현미 대표곡들

by 프리디와이♡ 2023. 4.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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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수 현미 프로필

 

가수 현미

본명:김명선 (金明善)

출생:1938년 1월 28일

평안남도 강동군 고천면 맥전리

사망:2023년 4월 4일 (향년 85세)
서울특별시 용산구 이촌동

국적:대한민국
학력:덕성여자대학교 (가정학 / 명예학사)

혈액형:O형

가족:어머니 박영빈
언니 김화선, 오빠 김명준, 여동생 김길자, 김명자, 김명옥
아들 이영곤, 이영준
둘째 며느리 원준희
조카 노사봉, 노사연, 한상진

종교:개신교 (그리스도의 교회)

데뷔:1957년 미 8군 번안곡 'O Danny Boy'

수상:1999년 제6회 대한민국연예예술상 특별공로상
1997년 제11회 예총예술문화상 대상
경력
2012.03 한국자유총연맹 홍보대사

현미의 어린시절

 

가수 현미

피난길에 이북의 선전가요가 아닌 대중가요를 처음 접하게 되었고 이에 매료되었다고 한다. 이후 대구에 정착하게 되었고, 여기에서 김백봉의 꽃초롱 오페라단을 찾아갔다고 한다. 김백봉은 최승희 무용단의 무용수로 있던 현미의 언니를 알고있었기 때문에 반갑에 맞이해 주었고 김백봉의 제의로 오페레타 '을지문덕'에 출연하게 되었다. 이후 대구에서 가장 큰 극장 무대에 올랐고 이덕화의 부친 이예춘, 김백희가 주연으로 하는 희망가극단의 가극공연에 출연해 용돈벌이를 했다고 한다.

 

현미의 연예계 생활 시작

 

가수 현미

그 이후 언니 김화선이 김화선 무용연구소를 차리자 여기서 시간을 보내며 무용을 더 배웠다고 한다. 그러던 중 김화선은 강원도 화천으로 이사하게 되었고, 현미는 서울에 남아 덕성여대 가정학과에 입학하게 되며 자취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고 한다. 용돈벌이 삼아 김진걸 무용연구소에서 무용을 배우며 활동하던 현미는 당시 작곡가 김희조 선생을 만나 미 8군 무대에 출연해 학비를 벌어볼 생각이 없냐는 제의를 받았고, 당시 보수가 일반 사무직보다 후했기 때문에 현미는 이 제의를 받아 이난영이 단장으로 있던 김시스터즈의 무용수로 취직하게 되었다.


이후 현미는 미 8군에서 승승장구하기 시작했고 당시 악단 소속 가수 중에서 개론티가 제일 좋았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10만환대의 개런티를 받았으나 현미는 당시 35만환이라는 파격적인 대우를 받았다고 한다. 그 외에도 악단장의 배려로 쌀가마나 쇠고기, 생선 등을 사서 집으로 보내주기도 했다고 한다.

미 8군 무대에서 당시 드물었던 여대생 프리미엄으로 현 시스터즈의 센터로 인기몰이를 했고, 진석규 단장이 상당히 아꼈다고 한다. 그러다 당시 밴드 마스터였던 이봉조를 만나게 되었고 이들의 관계를 우려해 진석규 단장이 둘을 갈라놓으려하다가 이봉조의 권유로 현미는 진석규 단장과 결별했다고 한다. 이후 존 스타크라는 미국인 사업가가 사업차 내한했다가 '헐리우드 쇼'라는 대규모 버라이어티 쇼를 기획하게 되었는데 이봉조와 현미를 특별 섭외 대상으로 삼았다고 한다. 그러나 오디션 합격 얼마 후 4.19로 인해 무산되었다고 한다. 이 일로 존 스타크는 파산하게 되었고, 현미의 정식 음반 발매도 늦어지게 되었다.
이후 이봉조의 아이를 갖게된 현미가 출산과 더불어 일을 쉬게 되었고, 수입이 끊겼던 현미는 당시 미 8군 쇼 기획업체로는 국내 최대 규모였던 화양 프로덕션에서 '세계의 휴일'이라는 라이브 쇼에 출연해 달라는 제의를 받고 최희준과 같이 무대를 서게 된다. 이때 노래하는 모습을 보고 유명한 의대 가문의 아들이 현미에게 호감을 느껴 몇번 동행을 제의했는데, 당시 이봉조와 연인관계였기 때문에 끝내 거절했다고 한다. 그가 후에 쓰리 보이로 명성을 날린 신선삼이라고 한다. 후에 그가 현미에게 '그 때 너무 멋있어서 납치하려고 했어요'라며 장난을 쳤다고 한다.

현미와 이봉조

 

가수 현미와 작곡가 이봉조

이후 이봉조의 아이를 갖게된 현미가 출산과 더불어 일을 쉬게 되었고, 수입이 끊겼던 현미는 당시 미 8군 쇼 기획업체로는 국내 최대 규모였던 화양 프로덕션에서 '세계의 휴일'이라는 라이브 쇼에 출연해 달라는 제의를 받고 최희준과 같이 무대를 서게 된다. 이때 노래하는 모습을 보고 유명한 의대 가문의 아들이 현미에게 호감을 느껴 몇번 동행을 제의했는데, 당시 이봉조와 연인관계였기 때문에 끝내 거절했다고 한다. 그가 후에 쓰리 보이로 명성을 날린 신선삼이라고 한다. 후에 그가 현미에게 '그 때 너무 멋있어서 납치하려고 했어요'라며 장난을 쳤다고 한다.

가수 현미의 사망

 

가수 현미


2023년4월4일 오전 별세했다. 향년 85세.

뉴스에 따르면 경찰은 이날 오전 9시37분께 서울 용산구 이촌동 자택에 김 씨가 쓰러져 있는 것을 팬클럽 회장 김모(73)씨가 발견했다는 신고를 받았다.

김 씨는 인근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사망 판정을 받았다.


 

현미의 남자지만 부인이 있었던 이봉조

이봉조

본관:장수 이씨
출생:1931년 5월 1일
경상남도 남해군 창선면
사망:1987년 8월 31일 (향년 56세)
서울특별시
학력:진주중학교(졸업)
진주고등학교(졸업)
한양대학교 (건축학과 / 학사)
배우자:첫번째 부인 노전숙, 사실혼 관계 현미
자녀:슬하 3남 3녀
종교:개신교

이봉조의 일생

1931년 5월 1일, 경상남도 남해군 창선면에서 태어났다. 학창시절은 진주시에서 자랐는데, 일찌감치 미국 재즈 음악을 들으며 음악에 대한 흥미를 키워 갔다고 한다. 진주중학교를 졸업하고 한양대학교 건축학과 4학년에 재학중이던 시절, 친구의 권유로 미8군에서 음악 활동을 하게 됐다. 거기서 재즈 색소폰을 연주했는데 뛰어난 실력을 인정 받으며 전국에서 공연을 갖게 되었다. 이 시절 한양대학교 건축학과 동기들의 말에 따르면 수업 내내 졸았다고 한다. 아마 밤에 미군 부대에서 공연하면서 생긴 피로로 인한 듯 하다. 여기서 받은 양담배를 친한 친구들에게 한 가방 들고 와서 뿌렸다고... 이후 서울특별시청 토목과 공무원으로 일하면서도 미8군 무대에서 재즈 색소폰을 연주했다. 당시 유명 색소포니스트인 엄토미의 제자로서 인정 받을 정도였다고 한다.

결국 공무원직을 그만두고 본격적으로 재즈 음악가의 길을 걷게 되었다. 내연녀였던 현미와 함께 수많은 명작을 내놓으며 명성을 떨쳤다. 애초에 1957년 현미의 미 8군 무대 데뷔곡이었던 '아 목동아!'를 번안 편곡한 사람이 이봉조였다. 1962년 현미의 1집 앨범인 '밤안개'가 공전 히트를 기록하면서 파트너 관계를 공고히 하였다. 그밖에도 정훈희, 윤복희, 김추자 같은 유명 가수들을 발굴하며 스타 작곡가로서 맹활약하였다.

1963년, 영화 음악감독으로 데뷔했다. 데뷔작은 '가정교사'. 그리고 이듬해엔 영화음악 연출가로서도 데뷔하였으며, 1967년에는 영화음악 연주감독으로 데뷔했다. 훗날 여러 국제가요제에서도 작곡가로서 본인의 이름을 알렸다. 본처인 노전숙과 자녀들이 모두 개신교 신자여서인지 색소폰 연주곡 CCM 음반도 다수 출판했다.

이봉조,현미,부인 노전숙

가수 현미 이봉조와 아들

노전숙과 열애 끝에 결혼했으며 슬하에 1남 3녀를 두게 된다. 하지만 그 사이 본부인 몰래 가수 현미를 만나 동거하게 된다. 이후 본부인인 노전숙과 가수 현미는 각각 아들을 임신할 때까지 서로의 존재를 몰랐다고 한다. 더욱이 놀라운 것은 현미의 첫째 아들과 노전숙의 셋째 아들이 동갑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다가 외도가 들통나면서 가정 파탄에 이를 지경이 되었다. 이봉조는 현미에게 이혼서류를 보여주면서 안심시킨 반면에 혼인신고를 계속해서 미루면서 지속적으로 두집 살림을 해왔다. 허나 이혼서류마저 가짜였다고 한다. 결국 한 팬의 전화로 이봉조가 지속적으로 두 집 살림을 해왔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현미는 15년 만에 별거를 요구하게 되었고 이에 흥분한 이봉조가 다 같이 죽자며 칼을 들고 쫓아왔다고 한다. 사실 60년대에는 비교적 종종 일어난 일이다. 그 당시 이혼사유 1위(그것도 매우 압도적이었다)가 부정행위 또는 두집 살림인 것을 보면 말이다.


절친이었던 신성일, 엄앵란 부부의 중재로 큰 분쟁으로까진 발전하진 않았지만, 이후 부인이 있는 본가로 들어가지 않고 쭉 홀로 살다가 1987년 8월 31일 심장마비로 별세했다.사망 직전에 현미와 재회해서 다시 합치기로 했으나 그 전에 고독사했다. 재회 당시 비참한 모습을 보고 현미가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예를 들어 틀니를 끼고 색소폰을 불고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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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봉조와 부인 노전숙
출처:영대사랑

여담으로 본부인인 노전숙 사이에서 낳은 4남매는 모두 훌륭히 성장하였다. 다들 명문대를 졸업하였고 외모도 출중하다. 아들 이영대는 서울대학교 법학과를 수석으로 졸업하였으며 재학중인 22세에 제26회 사법고시에 차석으로 합격했다고 한다. 서울고등법원 판사를 역임한 뒤 하버드대 로스쿨 유학을 걸쳐 뉴욕주 변호사 자격증도 취득. 현재는 서초동 소재 법무법인 수호의 대표 변호사로 활동 중이라고 한다. 게다가 광고도 찍을 정도로 미남이다. 이화여대 출신 엘리트인 노전숙처럼 딸들도 명문 이화여대, 숙명여대를 졸업해 의사, 교수, 대기업 임원과 결혼하였다.


이봉조와 부인 노전숙
출처:영대사랑

사망 이후 이봉조의 가족들이 이봉조 본인이 끝내 본부인 노전숙과의 합장을 거부했다는 이유로 합장을 반대했다고 한다. 그러나 본부인의 자녀들이 요구했고 현미측의 배려로 합장하게 되었다고 한다.

현미 대표곡


1962년 밤안개
1962년 내 사랑아
1963년 보고 싶은 얼굴
1964년 떠날 때는 말없이
1966년 무작정 좋았어요
1966년 애인
1967년 몽땅 내 사랑
1968년 바람
1971년 별
1991년 왜 사느냐고 묻거든
2001년 아내
2017년 내 걱정은 하지마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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