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현철배우의 아버지는 누구?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이하 ‘꼬꼬무')에서는 1986년 민주화 운동 중 일어난 부천 경찰서 성고문 사건에 대해 다룬다. 제작진이 이번 아이템을 선택한 이유는 제 68회 백상예술대상에서 남자조연상을 받은 조현철 배우의 수상소감 때문이었다고 해 관심이 집중된다.
수상 소감에서 조현철은 투병중인 아버지를 다정하게 위로하면서 세월호의 아이들과 故 변희수 하사, 故 김용균 군과 故 박길래 선생님의 이름을 언급했다. 제작진은 이 소감을 들으며 ‘투병중이시라는 조현철 배우의 아버지는 누구실까? 어떻게 이렇게 아들을 훌륭하게 키우실 수 있었을까?’ 궁금증을 품게 됐다.
조현철과 그의 형인 가수 매드클라운(본명 조동림)의 아버지는 교통공학 전문가이자 1세대 환경운동가로 유명한 故 조중래 명예교수다. 또 故 박길래 선생님은 상봉동 진폐증 사건의 피해자로, 조중래 명예교수와 환경운동을 함께하며 연을 맺은 바 있다. 박길래 선생님은 연탄제조회사를 상대로 한 소송에서 승리함으로써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공해병’을 인정받게 되는데, 이 소송을 담당했던 사람은 조중래 명예교수의 친형인 조영래 변호사였다.
조영래변호사는 누구인가?
서울대 법대를 수석으로 입학하고 사법고시를 1년 만에 패스한 천재이자, 언제나 사회적 약자 편에서 ‘무료로’ 싸웠던 인권변호사이자, '전태일 평전'을 집필해 세상을 뒤집어 놓았던 조영래 변호사. 43세라는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나 더욱 아쉬운,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하는 ‘진짜 어른’ 조영래 변호사가, 조카의 수상소감으로부터 꼬리에 꼬리를 물고 '꼬꼬무' 아이템으로 선택된 것.
꼬꼬무 제작진은 조영래 변호사가 담당했던 많은 사건들 중 부천서 성고문 사건을 주목했다. 부천서 성고문 사건의 피해자였던 권인숙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이 용기를 내 방송에 나서주었기 때문이었다.
1986년 여름, 서울대에서 제적당한 권인숙은 그 시절 많은 운동권 학생들이 그랬듯 신분을 위조해 공장에 취업했다가 실정법 위반으로 검거됐다. 죄를 인정하고 성실히 조사에 임했지만, 이상하게도 점점 강도 높은 신문이 이어졌다.
당시 인천 5.3 민주항쟁의 주동자들을 잡기 위해 혈안이 되어있었던 경찰 문귀동은 권인숙의 입에서 주동자의 이름을 듣기 위해 끝없이 추궁했다. 하지만 그 사건과 관련이 없었던 그는 당연히 원하는 대답을 들려줄 수 없었고, 없는 자백을 받아내기 위해 끝내 성폭력을 고문 수단으로 사용한다.
사건 이후 언론은 침묵했고 가해자인 경찰과 이를 수사하는 검찰은 한통속인 상황이었다. '윗선'은 이미 성고문 가해 경찰을 기소유예로 처리하라 명령을 내렸다. 그 때 권인숙이 만나게 된 사람이 바로 조영래 변호사였다. 서슬 퍼런 5공 정권 앞에 용감히 맞선 스물두 살 여대생과 '빵원짜리' 변호사 조영래. 세상에서 가장 불리한 재판의 결과는 어떻게 될 것인가?
하지만 정부는 이를 막기 위해 권인숙을 모함했고 검찰은 성고문에 앞장선 가해경찰 문귀동 경장의 성고문은 없었다고 결정에 기소유예했다. 이를 알게 된 조영래 변호사는 고발장을 써서 전국에 배포했다. 이는 국민들의 분노를 끓게 했고 범국민적인 운동으로 번졌다.
권인숙은 공문서, 사문서 위조죄로 법정에 나섰고 조영래 변호사는 밤새 최후 변론을 준비했다. 언론과 사람들의 시선이 권인숙에게 쏠렸다. 권인숙은 "이 사건이 커지길 바랐지만 개인이 감당하기엔 무거웠다. 힘들고 불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라고 말했다.
조영래 변호사는 변론을 시작했다. 조영래 변호사는 권인숙이 어떤 사람인지에 대한 이야기로 도입부를 시작했다. 장성규는 "어떤 글은 보이지 않는 손으로 인숙씨를 짓밟혔지만 어떤 글은 인숙씨를 살려내려고 애쓰고 있다"라고 말했다. 김이나는 "다시 피가 도는 느낌이었을 것 같다"라고 감동했다.
장도연은 "변론을 들으면서 인숙씨는 눈물을 흘렸다. 처음으로 위로를 받는 느낌이었다고 했다"라고 말했다. 권인숙은 "조변호사님이 변론서를 읽으며 우셨다. 그 분께는 온 마음을 다 바쳤던 사건이었다. 너무 너무 잘 써주셨다. 나에 대한 책임감, 애정이 담겨 있었던 것 같다"라고 회상했다.
하지만 권인숙은 징역 1년 6개월을 받았고 차가운 감옥에 갇혔다. 장도연은 "문경장은 개인 사업을 하면서 잘 살고 있다는 소식이 들렸다"라고 말해 주위를 안타깝게 했다. 조영래 변호사는 가해자를 법정에 세워달라며 재정신청서를 올렸다. 수 많은 시민들은 정권 탄압을 위해 거리로 나섰고 민주화의 열망은 6월 항쟁으로 이어졌다.
한편, 문귀동은 결국 가해자로 구속됐지만 뻔뻔한 태도를 일관하며 성고문 사실이 없다고 말해 보는 이들을 분노케 했다. 하지만 결국 유죄가 인정돼 징역 5년을 받았다. 권인숙은 모든 과정에 조영래 변호사가 함께 했다고 회상하며 그의 의로움에 다시 한 번 감사를 전했다.
빵원짜리 변호사,전태일 평전을 쓴 저자
'전태일 평전'의 저자 조영래 변호사는 전태일 열사와 원래 알던 사이가 아니었다. 이들은 단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었다.
전태일 열사가 열악한 노동현실을 알리려 평화시장에서 자기 몸에 불일 때, 조영래 변호사는 산속 암자에서 사법시험을 공부하고 있었다. 조 변호사는 청계천에서 한 노동자가 근로기준법 책을 안고 분신했다는 소식을 듣고 곧바로 전태일 열사의 빈소에 찾아갔다. 그게 이들의 인연의 시작점이었다.
조 변호사는 전태일 열사의 빈소에서 충격적인 듣게 됐다. 전태일 열사가 근로기준법을 읽으려고 밤새워 씨름하다가 어머니에게 '대학생 친구가 한 명만 있으면 원이 없겠어요'라고 말을 했다는 것이었다. 초등학교를 나오지 못한 노동자에게 한자로 된 법률용어들을 읽는 일은 너무 어려웠다.
조 변호사는 전태일 열사의 친구가 되기로 했다. 전태일 열사의 삶을 담은 글을 쓰기 시작했다. 조 변호사는 책을 통해 학생들에게 전태일 열사의 삶을 알려주고 싶었다.
그는 전태일 열사가 남긴 수기와 일기를 읽고, 자신이 수배 중인 상황에서도 전태일의 가족들을 만났다. 평화시장의 여공 순애 씨와 이야기를 나누며 글을 썼다. 조 변호사는 혹시나 여공이 불편해할까 봐 한 번도 메모한 적이 없었지만, 마치 녹음이라도 한 듯이 책 속에 그 내용이 담겨있었다.
그렇게 조 변호사는 3년 만에 원고를 완성했지만, 책으로 출판할 수가 없었다. 당시 1976년은 군부독재 시절이었고, 전태일 평전의 출간은 꿈도 못 꿀 일이었다. 결국 이 책은 일본에서 출간됐다. 저자의 이름은 가명으로 실렸다.
그로부터 5년 후인 1983년, 한국에서 출간됐지만, 책은 판매가 금지됐다. 사람들은 몰래 전태일 평전을 구해서 읽었다. 출판사에는 책에 감명받은 독자들의 전화와 편지가 끊이질 않았고, 저자에 대한 질문이 쇄도했다. 1987년 금서에서 해제됐지만, 이때도 조영래 변호사는 자신이 저자라고 밝히지 않았다.
조 변호사는 1990년 12월, 향년 43세로 지병인 폐암으로 사망했다. 그가 세상을 떠나고 한 달 후, 조영래 변호사의 이름이 실린 전태일 평전이 세상에 나올 수 있었다.
7년간 변호사 생활을 하면서 그는 자신의 글처럼 살기 위해 노력했다. 그는 '망원동 수재 사건', '대우어패럴 사건(구로 동맹 파업)', '진폐증 박길래 사건', '부천 성고문 사건' 등 거대 권력에 맞서는 소시민들의 변호를 맡았다. 그것도 무료로. 그래서 그에게 '빵원짜리' 변호사라는 별명이 붙었지만, 그는 약자의 편에서 100점짜리 변호사였다.
조영래 변호사가 사법연수원 검사시보 시절에 쓴 글에는 인간을 인간으로 대하는 마음을 절대 놓지 않겠다는 마음이 담겨있었다.
내가 하려고 하는 제일보는
피의자 또는 참고인,
가족들에게 친절히 대하는 자세를
견지하는 것이다.
어떤 경우에라도
친절한 자세를 흩뜨리지 않도록
어떤 경우에도
조금이라도 권력을 가진 자의
우월함을 나타내거나
상대방을 위축시키거나
비굴하게 만드는 일이 없도록
다른 것은 다 못하더라도
이것만 해낼 수 있다면
더 이상 좋을 수가 없겠다.
사람을 사람으로
대접하지 않아도 좋다고 한다면
인간성에 거는 우리의 모든 신뢰와
희망은 대체 어떻게 될 것인가.
그는 자기 경험과 인생의 철학을 아들에게 전해주고 싶었다. 그가 아들에게 보내는 엽서 편지에도 조 변호사의 진심이 담겨 있었다.
아들에게
앞의 사진은 뉴욕의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이다.
아빠가 어렸을 때는
이 건물이 세계에서
제일 높은 건물이었다.
아빠는 네가 이 건물처럼
높아지기를 바라지 않는다.
세상에서 제일 돈 많은 사람이 되거나
제일 유명한 사람,
높은 사람이 되기를 원하지도 않는다.
작으면서도 아름답고
평범하면서도 위대한 건물이
얼마든지 있듯이
인생도 그런 것이다.
건강하게 성실하게
즐겁게 하루하루 기쁨을 느끼고
또 남에게도 기쁨을 주는
그런 사람이 되기를 바랄 뿐이다.
실은 그것이야말로
이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처럼
높은 소망인지도 모르겠지만..
1990.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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