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6년, 대전 지역에선 “혼자 사는 여성들을 노린 연쇄 성범죄자가 있다”는 흉흉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1996년 대전 지역에서 공포의 시작은 단순한 소문에서 비롯되었다. “혼자 사는 여성들을 노린 연쇄 성범죄자가 있다”는 소문이 점점 지역 주민들의 불안을 자극하기 시작했다. 특히 “키 작은 남성이 늦은 밤 여성들을 쫓아다닌다”거나 “택시 기사가 수상하게 미행한다”는 등의 이야기들이 계속해서 들려왔다. 이와 같은 소문은 그저 지나가는 이야기가 아니라 실제로 일어난 사건들과 맞물려, 그 실체가 점차 드러나기 시작했다. 피해 여성들의 증언에 따르면, 같은 패턴의 범죄가 반복되고 있었으며, 이로 인해 지역 주민들 사이에서는 동일 인물이 저지른 일이라는 추측이 점점 퍼져갔다. 대전동부경찰서는 1999년부터 피해자들에게서 채취한 범인의 DNA를 데이터베이스화하여 유전자 감식 작업을 시작했지만, 범인의 신원을 특정하는 데에는 성공하지 못했다. 그러나 DNA 분석을 통해 최소 수십 건의 사건이 동일한 범인의 소행임을 확인했고, 범죄는 계속 이어졌다.
대담해지는 범인의 수법, 대전 발바리의 등장
2000년 9월, 대전 서구 용문동의 한 자택에서 벌어진 성폭행·성추행 사건은 그 당시의 공포를 극대화시켰다. 그날 범인은 여성 4명이 함께 거주하던 집에 무단으로 침입했다. 범인은 이들 중 한 명을 성폭행하고 나머지 3명을 강제 추행하는 대담한 범행을 저질렀다. 그때까지의 범행은 점점 대담해졌고, 피해 여성들을 결박하는 등의 정교한 수법이 추가되었다. 경찰은 이때부터 이 범인을 ‘대전 발바리’라고 명명하게 되었다. 범인이 범행을 저지르고 나서 발 빠르게 현장을 떠난다고 하여 붙여진 별명이다. 이 이름은 대전 일대에서 계속해서 퍼져나가며 사람들에게 큰 공포를 안겼다.
“대전 발바리, 누구냐 넌”
이 사건의 발단은 1998년 2월 7일로 거슬러 올라간다. 대전 서구 월평동에서 저녁 7시 30분경, 한 젊은 여성이 택시에 탑승했다. 이때, 그녀는 택시 기사에게 “길도 잘 모르냐”며 불만을 표했고, “요금이 왜 이렇게 많이 나왔냐”며 택시비를 던지고 내렸다. 이 일로 깊은 모욕감을 느낀 택시 기사는 보일러 수리공이라고 거짓말을 하고 그 여성의 집에 침입해 성폭행을 저질렀다. 범인은 택시 운전사 이중구였다. 사건 당시, 여성의 공포에 질린 모습을 보며 이중구는 자신이 마치 권력을 쥔 것 같은 희열을 느꼈다고 한다. 그날 이후, 그의 범행은 더욱 심화되고 빈번해지기 시작했다.
범행은 그의 습관이 됐다
이중구의 범행은 한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잡히지 않자 그는 더욱 대담하게 범행을 이어갔다. 2003년까지 대전에서 범죄를 저지르던 그는 그해 7월부터 충북 청주, 전북 전주, 경기도 용인, 대구 등 전국 각지로 이동하며 연쇄 성범죄를 저질렀다. 피해자는 총 184명으로, 대부분이 원룸에 혼자 사는 여성들이었다. 이중구는 늦은 밤 혼자 귀가하는 여성을 노리거나, 가스 배관을 타고 집에 침입해 범행을 저질렀다. 심지어 피해 여성의 남자친구를 묶어두고 그 앞에서 성폭행을 하는 등의 극악무도한 범죄도 있었다. 그는 피해 여성에게 친구를 부르게 한 뒤, 그 친구 역시 피해자로 만드는 방식의 범죄를 이어갔다.
특히 이중구는 같은 장소에서 여러 명의 여성을 성폭행하는 성향을 보였다. 피해자들에게는 “사랑한다고 말해달라”거나 “애원해봐라” 등의 변태적인 말을 하며, 신고를 해봤자 본인만 손해를 본다는 협박을 가했다. 범행 후에는 자신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 피해자를 목욕시키거나 휴대전화를 감추는 등 치밀한 행동을 보였다. 이와 같은 그의 범행은 단순한 성폭행을 넘어서, 피해자들에게 극도의 정신적 고통을 안겨주는 잔인한 행위였다.
결국 잡힌 꼬리… “잡았다 이놈!”
범행을 이어가던 이중구는 결국 경찰의 수사망을 피할 수 없었다. 대전동부경찰서는 사건의 패턴을 분석하던 중, 피해자들의 공통된 증언인 ‘키가 유독 작은 남성’이라는 진술에 주목했다. 또한 범인이 집 안에 있던 수건을 이용해 피해자의 손과 손가락을 결박하는 특이한 범행 수법이 여러 사건에서 반복된다는 점을 발견했다. 이로 인해 경찰은 용의자를 추려내는 데 성공했고, 마침내 첫 번째 범행으로부터 8년이 지난 2006년 1월에 이중구를 용의자로 특정할 수 있었다.
경찰은 이중구가 아내에게 거액의 돈을 처가에 전달하도록 한 뒤, 논산으로 도주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그러나 경찰이 추적했을 때, 그는 뒷문으로 도주해 경찰의 눈을 피했다. 이에 경찰은 2006년 1월 13일, 전국에 지명수배를 내렸다. 1월 19일, 이중구가 지인의 ID로 인터넷 게임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확인되었고, 경찰은 서울 강동구 천호동의 한 PC방에서 이중구를 체포하는 데 성공했다.
평범한 가정의 20대 딸을 둔 자상한 아빠였던 ‘이중구’
이중구는 157cm의 왜소한 체구를 가진 남성이었다. 그는 평소 조기 축구를 즐기며, 20대의 딸과 아들을 둔 평범한 가장이었다. 그가 근무한 택시 회사의 동료들도 이중구를 성실한 사람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이면에는 끔찍한 범죄자가 숨어 있었다. 경찰에게 체포되던 순간, 이중구는 “이제 후련하다”고 말하며, 그간 자신의 범행이 들킬까봐 얼마나 노심초사했는지를 드러냈다.
경찰이 그에게 “딸을 키우는 아버지로서 양심의 가책이 없냐”고 묻자, 이중구는 “내 딸이 성폭행을 당했다면 괴로웠을 것이다”라고 답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의 범행에 대한 죄책감이나 반성의 기미를 거의 보이지 않았다.
이중구도 기억 못 하는 범행 건수… 확인된 피해자만 184명
이중구는 1998년 2월부터 2005년 10월까지 약 8년에 걸쳐 대전을 중심으로 연쇄 성폭행을 저질렀다. DNA 검사로 확인된 피해자만 무려 184명에 달했다. 경찰이 그에게 범행 횟수를 물었을 때, 이중구는 자신이 얼마나 많은 성범죄를 저질렀는지조차 기억하지 못했다. 경찰이 DNA로 확인된 피해자의 수를 언급하자, 그는 “내가 그렇게 성폭행을 많이 했나요?“라고 되물으며 자신의 범행 규모에 대해 무감각한 반응을 보였다.
이중구는 성폭행, 강도, 절도 등의 혐의로 구속 기소되었고, 검찰은 법정 최고형인 사형을 구형했다. 그러나 1심 재판부는 77건의 강간과 강도, 절도 등의 죄목만을 인정하고, 그가 살인을 저지르지 않았다는 이유로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이중구는 항소했지만, 2심에서도 같은 판결이 내려졌고, 양측 모두 상고하지 않으면서 형량이 확정되었다.
가석방 가능성은?
이중구는 2026년에 징역 20년을 채우게 되며, 가석방 대상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그가 저지른 범죄가 워낙 중범죄로 분류되기 때문에, 가석방 가능성은 매우 낮은 것으로 예상된다. 그의 범행은 지역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으며, 피해자들은 여전히 정신적 고통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이중구가 감옥 밖으로 나올 수 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피해자들과 그 가족들에게는 또 다른 고통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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