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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이야기

세기의 연인 그러나 불행했던 결혼생활 '오드리햅번'

by 프리디와이♡ 2022. 2.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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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드리햅번

외모컴플렉스에 시달리다

20세기 가장 아름다운 여배우 중 한명을 꼽으라면 오드리햅번을 꼽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오드리햅번이 데뷔 당시에는 풍만하고 글래머러스란 몸매를 가진 배우들이 인기가 많았는데 그녀의 출현 이후에 그녀는 미인의 기준을 바꿔놨다. 그녀는 마른 몸매에 큰 키를 지니고 있었다. '로마의 휴일'에서 선보인 단발 헤어컷 역시 '햅번 스타일'이라고 현재까지 남았을 정도로 유명하다. 특히 '티파니에서의 아침을'에서는 그녀가 입고 나왔던 화장, 의상, 신발, 행동까지 모두 유행을 하고 지금봐도 촌스럽지 않을정도의 세련미가 넘친다. 그녀는 짙은 눈썹과 큰 눈을 강조한 메이크업을 했는데 지금봐도 예쁘다. 극중 그녀가 입었던 '지방시'브랜드를 세계적인 브랜드로 격상시켰으며 그녀가 신었던 플랫슈즈는 현재에도 '사브리나 플랫구두'라고 불리우고 있다. 그녀가 대중에게 끼친 영향은 어마무시 하다. 한마디로 그녀는 그시대 아이콘이었다.
이렇듯 '최고의 미녀'라는 찬사를 받는 오드리햅번 이지만 정작 본인은 외모 컴프렉스가 심했다고 한다. 그녀의 깡마른 몸은 전쟁시절 중에 10대 시절을 먹을 것이 거의 없이 어렵게 보냈기 때문에 39kg까지 빠지면서 아사할뻔 했다. 영양실조의 휴유증으로 생긴 마른 몸매와 다크서클이 그녀를 상징하는 인기의 비결이 되었다. 오드리햅번은 자신의 지인에게 자신은 피부도 좋지 않고 화장을 하지않으면 볼품이 없고 콧등도 빼끄럽지 않다고 털어 놓았다고 한다. 또한 자신의 건강과 몸매를 유지하기 위해 엄격한 식단관리와 운동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여느 사람들처럼 달콤한 디저트류를 좋아했는데 특히 초콜렛을 좋아했지만 그조차도 적당히 먹는 것으로 타협했다고 한다. 마른 몸매의 비결은 전쟁이라는 고통속에서 굶어 죽을뻔한 고통까지 이르러가 가지게 된 아픔인 것이다.

불행했던 결혼생활과 이혼

모든 사람들에게 전세계적으로 사랑을 받았지만 정작 그녀의 사생활은 불행했다. 그녀는 당시 엄청난 바람둥이에 성질도 더럽기로 소문나고 유부남이었던 '멜 퍼러'와 사귀게 된다. 그는 1954년 세번째 와이프를 버리고 오드리햅번과 결혼을 하는데 세간에선 오드리햅번이 아깝다는 이야기가 많았다. 당시 오드리햅번은 최고전성기의 탑여배우였고 멜퍼러는 사회적평판도 바닥이고 사생활적으로도 이혼도 3번이나 했다. 이 결혼으로 오드리햅번과 비교하여 자신의 무능함을 비관한 남편 멜퍼러는 열등감으로 인하여 잦은 다툼을 했고 그녀는 영화 제안을 거절하는등 남편 배려하게 된다. 햅번이 임신중에 영화촬영을 하다가 낙마사고를 당해 유산을 하게 된다. 이후 잦은 유산을 하게 되자 결혼생활 말쯤에는 그녀에게 폭력까지 휘둘렀다고 한다. 참다못한 그녀는 1966년에 이혼하게 되는데 후에도 멜퍼러의 이름을 올리기조차 싫어했다고 한다. 멜퍼러는 햅번과의 이혼후에도 5번째여자와 결혼하고 장수하다가 2008년 만 9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오드리햅번은 1969년 로마의 휴일 촬영 당시부터 오드리햅번과 결혼할거라고 말하던 이탈리아 정신과 의사 '안드레아 도티와 재혼했다. 재혼시 나이가 만 39세 였는데도 아들 하나를 낳았다. 그의 남편인 안드레아도티는 중년의 햅번을 받아 들이지 못하고 수도 없이 바람을 폈다고 한다. 파파라치에게 찍힌 사진이 수백장인데 다 다른 여자였다는 이야기도 있고 그녀가 외출하면 대놓고 침실에 다른 여자를 불러 들이기도 했다고 한다. 그때 그녀는 영화활동을 중단하고 엄마로서의 삶을 살았다. 아들 둘을 키우는데 집중했다. 결혼생활은 불행했으나 자식들을 위해서 참고 살았던 것이다. 결국 13년만에 이혼했다. 그래도 오드리햅번은 안드레아 도티와는 계속 연락을 하고 지냈다고 한다.


봉사하는 삶으로 생을 마감

매혹적인 입술을 가지고 싶다면 친절한 말을하라

사랑스런 눈을 가지고 싶다면 사람들의 선한 점을 보아라

날씬한 몸매를 가지고 싶다면 그대의 음식을 배고픈 자와 나누어라

예쁜 머릿결을 가지고 싶다면 하루에 한번, 어린이가 그 손가락으로 그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게 하라

아름다운 자세를 가지고 싶다면 결코 그대 혼자 걸어가는 것이 아님을 알도록 하라.

재산보다는 사람들이야 말로 회복되어야 하고, 새로워져야 하며,
활기를 얻고, 깨우쳐지고, 구원받고 또 구원 받아야 한다.

햅번의 유언이라고 돌아다녔던 이 글귀는 시인 '샘 레벤슨'의 시로 숨을 거두기 1년전 크리스마스 이브에 자식들에게 들려주기도 했다고 한다. 오드리햅번은 영화계 은퇴 후 유니세프 대사로서 인권운동과 자선사업가로 활동했다. 그녀는 암투병중에도 소말리아에 방문하여 구호활동을 하였다. 어릴적 독일 나치군의 횡포에 쓰레기를 뒤져 먹을 정도로 심각한 기근에 시달렸던 그녀는 어릴때의 경험이 자선활동을 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자신이 전쟁 난민이었기 때문에 그들의 어려움을 외면할 수 없었던 것이다.
외모도 아름답지만 말년에는 사람들에게 봉사하면서 아름다운 마음과 사상을 전세계에 알린 오드리 햅번! 비록 그녀의 개인 사생활은 불행했지만 멋진 한 사람으로 많은 사람들의 우상으로 남아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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