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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이야기

4.19혁명의 시작점 청년 '김주열'의 사진 한장

by 프리디와이♡ 2022. 2.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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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열 열사

3.15 부정선거

이승만은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이다. 그는 헌법을 개정하면서 3번의 연임 정치를 해왔다. 3월 15일 실시되는 선거에도 이승만이 대통령, 부통령으로 이기붕 후보가 내정되어 있었다. 당시 선거일 전에 투표하거나 3~9명씩 묶어서 공개적으로 투표하기, 사람들의 투표율이 높지 않은것을 감안하여 미리 1/4의 표를 미리 선거투표함에 넣어두는 식으로 부정부패를 하였다. 경찰과 공무원들이 부정선거를 도왔다. 선거가 시작되자마자 여당의 사전 투표는 들통이 났고 선거장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비단 한곳뿐만이 아니었다.

부정선거로 분노한 사람들

3.15 부정선거 소식을 들을 사람들은 분노했다. 특히 각지에서 학생들 중심으로 들고 일어나 시위가 일어났는데 이날 김주열도 형의 손을 잡고 시위에 참석하게 되었다. 학생들은 학교에서 민주주의에 대해서 배웠고 민주주의를 침탈하는데 참지 못했던 것이다. 김주열은 중학교를 졸업하고 마산상고 입학식을 앞둔 우등생이었다. 사람들이 거리로 나가자 무장한 경찰들은 공포탄을 쏘기 시작했고 사람들은 비명을 지르며 흩어지게 되었다. 이때 김주열의 형 김광열은 동생 주열이의 손을 놓치게 되었다. 무력으로 사람들을 진압한 것이다. 당시 무력 진압으로 185명 부상당하고 9명이 사망했다. 사망자중에 6명은 10대였다.

 

 

 

얼굴에 공포탄을 맞고 발견 된 시신

발견 당시 김주열 열사의 사진

그 뒤 어디에서도 김주열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그의 가족은 그를 찾아 수소문 했다. 김주열의 모친은 남원에서 마산으로 와서 경찰에게 도움을 요청했으나 아무도 도와주지 않았다. 그때 한명의 기자가 관심을 가졌는데 그의 이름은 '허종'이었다.
그러던 어느날 신문사에 김주열이 시신을 시청뒤 연못에 던져졌다라는 제보가 왔다. 3시간 뒤에 중앙부두로 가라는 정보를 얻었다. 허종기자는 바다에 떠있는 시신을 발견하게 되었고 가슴팍에 숨겨둔 카메라를 켜고 셔터를 눌렀다. 그 시신은 얼굴에 잔뜩 무엇인가 박혀있었고 주먹을 꽉 주고 꼿꼿하게 서있는 자세였다.
사진 속 시신은 김주열이었다. 김주열의 얼굴에는 길이 20cm에 직경 3cm, 포탄프로펠러가 달린 쇳덩이가 오른쪽 눈을 관통해 목까지 박혀 있었다. 쇳덩이는 최루탄으로 프로펠러를 달아 추진력을 높였고 장벽뒤에 사람에게만 쏘는 것이었다. 그런 최루탄이 사람 얼굴에 박혀있던 것이었다. 누가 17살 김주열 얼굴에 최루탄을 박았을까? 최루탄을 쏜 범인을 얼마후에 밝혀졌는데 그는 박종표 경위였다. 부정선거에 반대하는 시민에게 경찰이 최루탄을 얼굴에 쏜 것이었다. 그 과정에서 박종표 경위는 김주열이 사망하자 돌을 메달아 바다에 던졌던 것이다. 시신은 27일 만에 바다에서 발견되었으나 부패하지도 않았고 파도에 떠내려 가지도 않고 주먹을 쥐고 발견된 것이었다. 그 모습을 허종 기자가 찍어 세상에 알린 것이다.

4.19혁명의 시작점이 된 김주열 열사의 사진 한장

허종기자의 기사가 실린 당시 신문

허종기자가 찍은 김주열 사진과 기사는 전국적으로 보도 됐다. 이를 계기로 마산에선 2차 시위가 일어났다.김주열의 소식을 들은 수십명의 대학생과 시민들이 전국적으로 뭉쳤다.
'나가자! 자유의 비결은 용기뿐이다. 우리의 대열은 이성과 양심과 평화 그리고 자유에의 열렬한 사랑의대열이다. 모든 법은 우리를 보장한다.'
서울대학교 학생회는 4월 19일 화요일 제 1선언문을 발표한다. 엄청난 시위가 일어나자 이승만 정권은 비상계엄령을 내리고 무차별 발포를 한다. 100여명의 사람들이 사망하고 당시를 피의 화요일이라 지칭하기도 한다. 후에 교수들까지 시위에 동참했고 시위는 멈추지 않았다.결국 김주열의 시신이 발견된지 보름만에 이승만은 하야를 하고 하와이로 망명한다. 피의 화요일이 민주주의의 승리로 바뀐것이다.
현재 전라북도 남원에는 김주열 열사에 기념관과 추모공원 그리고 김주열로라는 도로가 있다.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는 김주열 열사의 죽음을 결코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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