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인물이야기

한국의 노동운동을 상징하는 인물 전태일

by 프리디와이♡ 2022. 1. 25.
반응형

전태일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내가 전태일의 이름을 처음 들었던 것은 1995년에 홍경인 주연의 영화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을 통해서 였다. 당시 나는 학생신분이었기 때문에 이 영화의 대해서 듣기는 했지만 직접 보지는 못하였으나 대충 어떤 스토리인지는 워낙 유명했기 때문에 알고 있었다.

당시 평화시장은 의류상가와 제조업체가 밀집되어 있었고 1층은 상가로 사용되었고 2~3층은 500여개의 제조업체가 모여있었는데 공장들은 모두 영세한 규모여서 6.6m²의 공간에 13명이 일하는 곳도 있었고, 큰 곳은 40m²의 공간에 50여명이 일했다고 한다.이처럼 좁은 공간에 다락을 만들을 그곳에서 일하다 보니 노동환경이 매우 열악했다고 한다. 좁고 햇빛도 없는 다락방에서 아침8시에 출근하여 밤10~11시까지 하루 14시간씩 근무했다. 한달에 단 2틀만 쉴 수 있었다고 한다. 당시 대부분은 13~17세에 어린 소녀들이 초과근무수당도 받지 못하고 극심한 저임금 노동에 시달렸다고 한다. 그 어린 보조원들은 '시다'라고 불리였다. 닭장처럼 가득하고 제봉실엔 먼지로 가득찼지만 손을 씻을 곳조차 마땅히 없었던 평회시장의 근무환경은 너무나 열악하였다.
일찍이 아버지에게서 재봉일을 배웠던 그는 기술을 금방 익혀서 재봉틀을 다루는 재봉사가 되었다. 그는 가난하고 어려운 상황에서도 주변 사람들의 어려운 상황을 외면하지 않았고 어린 여성 노동자들이 열악한 노동환경에 시달리는 것을 보면서 노동운동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였다. 함께 일하던 여성 노동자가 폐렴에 걸린 상태에서 해고되자 그녀를 도우려 애스다가 자신도 해고되는등 노동자들의 노동환경을 개선하려는 노력을 멈추지 않았다.

 

 

 

노동운동의 상징 전태일 열사의 분신

전태일은 1968년 근로기준법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일일근무 8시간, 주간 근무 48시간, 주1회 유급휴일 보장이었지만 현실은 하루 14시간이상 근무, 월2회 휴무가 고작이었다. 전태일이 근로기준법의 내용을 알렸으나 오히려 그는 해고 되었고 더이상 평화시장에서도 일할 수 없게 되었다. 한동안 막노동을 하며 지내던 그는 1970년 9월 평화시장으로 돌아와 삼동회를 조직하고 노동청, 서울시, 청와대등 진정서를 제출했다. 이러한 내용이 '경향신문'에 실려 사회적 주목을 받았으나 행정기관과 사업주들의 조직적인 방해로 무산되었다. 1970년 11월13일 전태일과 삼동회 회원들은 평화시장앞에서 근로기준법이 노동자의 권리를 제대로 보호하지 못하는 현실을 고발하기로 했으나 경찰들의 방해로 시위가 무산되려는 위기에 놓이게 되었다. 전태일은 자신의 몸에 석유를 뿌리고 불을 붙였다. 그리고 외쳤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병원에 실려간 전태일은 어머니께 자신이 못다한 일을 어머니가 대신 이뤄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그날 세상을 떠났고 경기도 마석의 모란공원에 안치되었다.

 

전태일의 죽음, 52년 후 현재

전태일의 죽음은 저임금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면서도 최소한의 법적 보호도 받지 못한 채 고통받던 노동자들의 현실을 고발하여 노동문제의 관심을 높이고 노동자들 스스로 환경을 개선하려고 노력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잇단 저항과 단체행동이 활발히 전개 되었다고 한다.
전태일이 1970년 11월 13일에 사망 후 52년째가 되었다. 그렇다면 2022년 현재는 과연 어떤 근무환경일까?2022년 현재 근로기준법이나 최저임금제도같은 많은 법들이 시행되고 있다. 1970년대보다는 많은 발전을 하였지만 한국이 여느 선진국에 비하여 근무환경이나 일의 대한 만족도는 최저를 기록할 만큼 아직도 좋지 못하다. 아직도 하루 8시간의 근무시간을 교묘하게 어기거나 꼼수를 부리고 최저 임금조차 받지 못하는 근로자들이 아직도 많은게 현실인듯 하다. 하루빨리 우리나라도 선진국처럼 일의 질이나 근무환경, 임금, 휴가나 복지제도 면에서 만족도가 높아지길 기대해 본다.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