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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이야기

나혜석, 이혼고백서 나는 말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

by 프리디와이♡ 2022. 1.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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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혜석

53세 길에서 죽은 여인

1949년 3월 14일 대한민국 관보는 한 여성의 행려병자의 부고를 실었다. 사망3달만이었다. 환자는 단한사람의 배웅도 받지 못한체 세상을 떠났다. 나이 53세. 본적도 주소도 알 수 없었다. 가진것이라곤 헌옷 한개가 전부이고 남긴것이라고는 이름 석자 뿐이였다. 나혜석. 조선 최초의 여류 서양화가였다.대표적 신여성으로 수많은 최초의 주인공이었던 나혜석 그녀는 왜 길위에서 홀로 죽어갔을까?행려병자가 된 천재화가 나혜석. 파란만장한 삶을 살며 숱한 화제가 됐지만 그녀의 대해서 제대로 알려진 사실은 그리 많지않다. 그녀는 살아서는 물론 죽은 후에도 세상에 비난에 시달려야 했다.
나혜석은 무엇때문에 그렇게 세상에 질타를 받아야 했을까?

 

조선 최초의 여류서양화가가 되다.

1914년 4월 매일신보는 사흘이 멀다하고 한 여학생의 기사를 올리고 있었다. 남자도 대학에 가기 어렵던 시절 일본 유학까지간 이 여학생은 선망의 대상, 시대의 스타였다. 남보다 출중한 여자유학생 나혜석이다.
나혜석은 수원에서 여고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도교 남쪽에 사가미하라시에서 이곳 여자 미술학교를 다녔다. 당시 도교에 있었던 이 학교는 일본의 5대 미술학교로 하나로 뽑히던 100년에 역사를 가진 명문학교이다. 근대 초기 여성에게 그림을 가르쳤던 학교는 조선과 일본을 통틀어 여자미술학교가 유일했다. 수백명의 졸업생 중 유일한 조선인이었던 나혜석 그녀는 서양화를 전공했다. 당시 서양화 전공은 매우 드물었다. 비록 미술학교지만 당시 90%가 재봉과 자수등 여성과 친숙한 전공을 선택했는데 서양화를 전공하는 학생은 2~4%에 불과했다. 어렸을때부터 그림을 좋아했던 나혜석은 과감히 다른 전공을 선택했고 학과 성적도 상당히 좋았다고 한다. 나혜석의 이름앞에는 늘 최초라는 수식어가 붙었다. 그녀는 선각자로서 자신의 사명을 자각하고 있었다.나혜석은 지식인으로서 조선여자의 입장과 지위를 대변하는데 앞장섰다.

파격적인 결혼 조건

"일생을 두고 지금과 같이 나를 사랑해주시오."
"그림 그리는 것을 방해하지 마시오."
"시어머니와 전실 딸과는 별거하게 하여 주시오."
그 당시에는 첩을 두고 사는것이 보편적인 시대에 위의 3가지 결혼조건은 엄청나게 파격적이었다. 당시에는 상상할 수 도 없는 조건을 걸었지만 그의 남편인 김우영은 모든 조건을 수락하고 1926년 둘은 결혼을 하였다. 그녀의 아버지 나기정은 여러명의 첩을 거느리고 있었다고 한다 특히 그녀보다 1살많았던 첩은 그녀의 어머니 무시하고 온갖 갑질을 하였다고 한다. 그리하여 그녀는 결혼조건으로 저런 조건을 내걸지 않았나 싶다.
그녀는 결혼후 4남매의 어머니와 예술가의 삶 사이에서 많은 고통이 있었다. 흔히 요새 말하는 슈퍼우먼컴플렉스에 시달리고 있었다. 가정생활과 일 사이에서 오롯이 혼자 감당해야 하는 삶은 그녀를 더욱 더 힘들고 지치게 하였다. 삶의 지쳐가던 그녀의 예술적 열정도 지쳐갈때쯤 남편 김우영을 따라 부부동반으로 세계일주여행을 따라가게 된다.

파리, 그곳에서 위험한 사랑에 빠지다.

부부가 프랑스 파리에 있을때 남편은 법공부를 하러 독일로 가고 나혜석은 그림공부를 더하고 싶다고 파리에 머물게 됐다. 파리에서 한국동포인 최린을 만나게 된다. 최린은 3.1운동 당시 민족 대표 33인으로 활동하다가 훗날 친일 인사로 변절한 인물이다. 만리타국에서 최린과 사랑에 빠지게 되고 김우영과 나혜석은 다시 고국으로 돌아와서 남편 이우영에게 이혼을 당하게 된다. 당시 남자는 간통죄가 적용되지 않고 여자만 간통죄가 적용되는 시대에 여자가 바람을 피워서 이혼한다는 것도 큰 죄였지만 나혜석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또 글을 기고 하게 된다. 그글은 '이혼고백서'이다.

조선 남성 심사는 이상하외다.
자기는 정조관념이 없으면서 처에게나

일반 여성에게 정조를 요구하고
또 남의 정조를 빼앗으려고 합니다.

 

모든사람들의 적이 되다.

당시는 100년도 앞선 시대라 나혜석의 글과 사상은 남성들뿐만아니라 여성들의 지탄도 받았다. 그녀의 글과 그림은 어디서도 환영 받지 못하였으며 그녀는 점점 돈벌이도 하기 힘들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창작활동을 게을리 하지 않았지만 집이 불타게 되고 그림들도 불타고 그녀는 육체적으로도 병을 얻게 되어 손을 떨고 그림과 글조차 제대로 작성할 수 없게 된다. 결코 순탄하지 않았지만 그녀는 자신의 삶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그리고 세상을 향한 말을 멈추지 않았다. 세상으로부터 외면받던 나혜석은 53세 나이에 길위에서 사망했다. 나혜석은 부자유한 시대에 한인간으로 세상에 섣던 자유인이었다. 나혜석은 한 여성이기 이전에 한 인간이길 원했다. 바로 그 욕망 때문에 파멸했다. 세월이 흘러 현대가 됐지만 그녀가 외쳤던 여성의 고민은 여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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